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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대입학력고사를 치르던 날. 그때는 선지원 후시험이어서 각 대학마다 마련된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렀다. 굳이 마다하는 나를 설득해 어머니는 고사장 앞까지 따라 오셨다. 잘 하라는 말. 잘 하겠다는 말. 그런 저런 몇 마디 나눌 사이 없이, 빨려 들어가듯 고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에 어머니는 깊은 심호흡을 나와 함께 하셨을 테고. 날이 훤하게 밝도록 그 자리에 서 계셨을 것이다.

▲ 수능 고사장 앞은 이른 새벽부터 북적거립니다. 이것이 축제의 풍경이라면 참 좋겠습니다.
ⓒ 한준명
오늘(17일) 아침 6시 경. 수험생을 응원하기 위해 아이들 10명과 함께 도착한 수능 고사장에는 벌써 응원전이 한창이다. 어느 학교 아이들은 여기서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고, 어느 학교는 어제 오후 3시부터 자리를 잡아 놓고 아침까지 교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매년 대입 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절묘하게 날짜를 맞춘 듯이 추웠다. 고사장으로 향하는 수험생이 느끼는 추위는 더했겠고, 밤새 그들을 기다린 후배들이 느꼈을 추위는 그보다 더했을 것이다. 그래도 올해는 소위 '수능 한파'가 없어서 다행이다. 웃옷을 벗어제치고 목청을 높여대도 견딜 만하니 말이다.

▲ 입시 한파 없는 수능일. 웃옷을 벗어제친 아이들
ⓒ 한준명
세상에 이런 풍경을 연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고사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의 비장함만큼이나, 머지 않아 자신들에게 다가올 현실을 떠올리며 북과 꽹과리를 두들겨대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후배들의 표정도 진지하다.

이 정도 풍경이면 잔치를 연상할 듯도 한데, 가슴 한 켠이 묵직하다. "지키겠습니다. 어머니와의 약속"이라고 쓴 현수막. 언제나 공부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습관처럼 해왔던 약속. 오늘 그 약속은 이루어질까.

월드컵을 치른 이후, 수능 고사장 앞에 울려 펴지는 응원 소리는 대개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해 왔던 그대로이다. 다만 그곳에는 따뜻한 차가 있고, 하얀 입김이 있고, 비장하게 스쳐 지나가는 표정들이 있고, 뒤돌아 뛰어 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들의 빠알간 눈길이 있다.

▲ 지킬 수 있다! 어머니와의 약속.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한준명
누구나 저 문을 지나쳤거나, 저 문으로 사랑하는 이를 들여보냈던 이들은 알 것이다. 요란한 소리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고사장 안으로 들어갈 때의 기분.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그리고 살아온 날들이 순서 없이 뒤범벅이 되어 머리 속에 한꺼번에 스쳐가는 느낌.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부모님들이 저 문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이 종일 뒤숭숭할 것인가.

이런 일이라도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가 함께 공감하며 이야기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위안이 될까? 아니, 다음 세대에게 옛날 이야기로 들려주어도 좋으니, 이런 일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저 어려웠던 시절. 공부 하나 잘 하는 것이 모두의 희망이었던, 그래야만 잘 살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로 남겨두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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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차 국어교사.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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