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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항쟁 당시 진압부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6일은 '부마 민주항쟁'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부마 민주항쟁' 25주년을 맞아 이를 새롭게 재평가하는 영상물 두 편이 때맞춰 제작돼 눈길을 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제작한 <역사 다시보기- 부마항쟁 편>과 부산 동명대학교 학생 6명이 만든 <부마항쟁 그리고 그 후>가 그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역사 다시보기- 부마항쟁 편>은 부마항쟁의 중심적인 내용과 부마항쟁의 배경이 되는 유신정권의 비민주성과 억압성을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추어 제작됐다.

양금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은 '과거의 우리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역사를 일궈왔던 민중들의 고통과 노력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좀 더 발전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는가'라는 취지에서 청소년들의 관심을 기대하며 일선 학교에 CD로 배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부마 민주항쟁' 25주년 기념 포스터
부산 동명정보대학교 장석근씨 외 5명의 <부마항쟁 그리고 그 후>는 4ㆍ19, 5ㆍ18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은 부마민주항쟁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그 정신을 되새겨 보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특히 영상을 통해 개인주의 성격이 강한 대학생들의 의식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국민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림으로써 대학생 스스로의 의식에 변화를 주고자 한다는 기대의 변을 밝혔다. 이 영상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개최한 영상공모전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한편, 부산-마산지역에서는 16일과 17일 부마민주항쟁 25주년 기념식을 각각 열 계획이다. 부산은 16일(토) 오후5시 부산 민주공원 대강당에서, 마산은 17일(일) 오후 2시30분 경남대학교 10ㆍ18광장에서 개최한다. 이날 행사에는 부산 마산지역 학생, 시민들과 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부마항쟁과 유신정권 종말의 상관관계
1979년 당시 정치적 배경

1972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출범한 유신체제의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9년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내세운 김영삼이 김대중의 지원에 힘입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당선되자 더욱 강경하게 야당을 압박하고 정국은 경색되었다.

첨예한 여야간의 대립양상 속에 8월 11일 YH사건에 이어 9월 8일 김영삼의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그리고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의 사건이 터지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저항과 민심이반이 격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는 강공을 펼치자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불거지면서 경남지역 국회의원들의 반발과 지역의 민심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당시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 16일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이에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발전하였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야당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KBS부산방송국, 서구청, 부산세무서, 파출소 21개를 파손하였다.

이에 정부는 18일 새벽 1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또 시위가 마산ㆍ창원으로 번지자 20일을 기해 이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현장에서 상황을 분석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민심의 이반을 감지하고 유화정책을 보고서에 올리지만 경호실장 차지철과 박 대통령은 이를 거절한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이룩한 경제 발전의 취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모든 문제를 공안문제로 해결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며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결국 김재규에 의해 26일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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