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J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 영화중에는 조폭 일색의 찌르고 깨부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된장찌개처럼 구수한 영화가 더러 있다. <보리울의 여름>이나 <선생 김봉두> <집으로>가 그러하다. 특히 <선생 김봉두>와 <집으로>는 흥행에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호평을 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인어공주>가 개봉 될 즈음,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참 제목 한번 유치하네. 비디오로 바로 나오겠군.' 흥행실패를 제목만 보고 미리 짐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6월 30일에 개봉한 <인어공주>는 개봉한지 얼마 안 돼 서서히 극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나 역시 이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 지 못했다. 단지 전도연이 수영하는 포스터를 아련히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입안 가득히 고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배꼽 잡는 폭소도 아니요, 가슴 찡한 눈물도 아닌 잔잔한 미소와 감동은 영화를 본 이후 한동안 지속됐다. 머릿속에는 현실속의 전도연(나영)과 처녀시절 엄마 역을 맡은 전도연의 두 모습이 끊임없이 교차됐다. 누가 이 영화를 실패작으로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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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어공주>의 흥행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인어공주가 개봉한 날짜는 지난 6월 30일, <스파이더맨 2>와 동시에 개봉했다. 한여름 영화계의 흥행공식은 공포물이나 화끈한 블록버스터이다. 이후 <해리포터 3> <아이 로봇> <반 헬싱> 등이 줄줄이 7월부터 선보였다. <인어공주>는 여름공식의 틀을 과감히 깨뜨렸으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무더운 여름에 잔잔한 영화는 관객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알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 영화 속에는 잔잔한 그리움과 애절함이 들어 있다. 현실의 나영이 과거 엄마의 처녀시절 속으로 들어가 엄마의 첫사랑을 성사시켜주는데 힘을 보태주는 면에서는 판타지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 영화 장르를 판타지로 분류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인물이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모티브를 잠시 빌렸으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편의 동화처럼 풋풋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영화 내내 눈의 피로를 풀어줄 것 같은 푸른 바다와 제주도(우도)의 예스러운 장면, 돌담길, 소품 속에 등장하는 옛날 국어책과 오래된 공책, 고무달린 연필 등 예전에 꼭 한번 써봤을 추억 가득한 물건을 볼 수 있다. 자전거탄 우체부의 다정한 모습 등 화려한 액션영화에서 볼 수 없는 푸근함이 이 영화에는 가득 담겨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영상이 좋다고 해서 배우들의 연기가 형편없다면 그야말로 졸작이 되어버렸을 텐데 <인어공주>에서는 일단 안심해도 될 것 같다.

1인2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 전도연의 물오른 연기 또한 주목해 볼만 하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나영의 역할과 과거 처녀시절에 해녀를 했던 엄마 연기를 동시에 선보인 전도연은 커다란 눈망울에서 가슴 잔잔한 눈물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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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에서 인자한 맏며느리이자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줬던 고두심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수많은 세월에 험한 파도를 헤쳤던 해녀답게 그의 연기에는 억척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다. 좀처럼 침을 뱉지 않고는 못사는 장면이나 목욕탕 때밀이면서도 절대 자존심을 구부리지 않고 젊은 손님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우는 장면 등 단내나면서도 질퍽한 연기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박해일(진국 역) 역시 특유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푸근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줬던 살인 용의자의 냉철함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우편배달을 해주며 나영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 속에는 친근함이 가득 배어 있다.

우리가 흔히 억척스러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아줌마',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려 어느새 굵은 주름으로 가득한 채 고개 숙이고 다니는 '아저씨', 그들도 역시 젊은 시절에 풋풋한 사랑을 했었음을 이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부모님의 첫사랑 역시 그러했으리라.

한국 사람들의 뱃속은 분명 외국인들의 속과 다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마지막에는 매콤한 김치찌개를 먹거나 냉면, 아니면 펄펄 끓는 된장찌개로 속을 다스려야 '잘 먹었다'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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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천만 관객을 웃도는 영화를 보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가슴 훈훈해지는 영화를 보며 블록버스터의 홍수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우리들 마음이리라. 특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더욱 그러하다. 이 영화가 지금쯤 개봉되었더라면 관객들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아쉬움이 남는다.
2004-10-08 15:5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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