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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터를 파헤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가 일(日)자 모양이고, 그 앞으로 죽 이어진 덕수궁 앞 쪽에다 세워진 경성부청(즉 서울시청)이 본(本)자 모양이니, 여기에 다시 대(大)자의 형상인 북악산과 어우러져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를 만들어낸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가 조선의 민족 정기를 압살하는 동시에 그네들의 영구 통치를 획책하려는 저의를 담아 조선의 심장부에다 구태여 그러한 생김새의 건물을 배치한 것이라는 해석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건 누가 들어도 당연히 통탄하거나 분개하여 마지 않을 일이라 하겠다.

▲ 흔히 '본(本)'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고 알려진 경성부청(즉, 서울시청)을 위쪽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그런데 정작 이 건물의 설계자는 '본'자가 아니라 '궁(弓)'자로 인식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건물 자체도 완전한 대칭형이 아니라서 '본'자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데는 그 근거가 좀 희박한 듯이 보인다.
ⓒ 이순우
그런데 이러한 '대일본' 형상에 관한 속설은 도대체 언제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것일까? 그리고 어디까지가 정말 믿어도 될 만한 부분인 것일까?

이미 많은 이들에게 마치 상식처럼 되어 버린 얘기를 두고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것 같긴 하지만, 실상은 이러한 속설이 세상에 공공연하게 드러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저 공중파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이러한 얘기가 보도된 탓에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 되었을 따름이 아닌가 한다.

전적으로 과문한 탓이라 여기지만, 안타깝게도 이에 관한 것으로는 아직까지 1990년 무렵의 시점을 넘어서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조차도 이제껏 구전되던 속설을 채록했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발한 착상을 빌려온 것이었는지는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인식이 일제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 확실한 건지 아니면 훨씬 후대에 느닷없이 등장한 건지는 정확하지 않다는 얘기이다.

더구나 식민통치자들이 설령 그러한 저의를 가진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네들의 속내까지 딱 집어낼 재간이 없으니까 이 부분 또한 제대로 검증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어쨌거나 적어도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대일본' 형상에 관해 공개적으로 확인된 기록은 '아직' 없다.

▲ 조선총독부 청사의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던 시절의 경복궁 일대 전경이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총독부 청사가 '일(日)'자 모양의 건물인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양은 '중정형(中庭型)'이라 하여 예전에는 비교적 흔했던 건축 양식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것이 정말 일본의 '일'자를 뜻하는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한다.
다만 조선총독부 청사의 경우에 그것이 '일(日)'자 모양을 지녔다는 사실은 줄곧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여기에서 말하는 '일'자가 반드시 '일본'이라 할 때의 그것을 의미하는지는 뚜렷하게 입증되지 않는다. 흔히 '근세부흥식'이라고 표기했던 식민지 시절의 건축물 가운데는 그러한 형상을 지닌 사례들이 비교적 흔하게 발견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중정식(中庭式)'의 건물 배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가운데를 비워 두고 그 주위를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꼭 '일(日)'자 형만이 아니라 건물의 용도와 크기에 따라 때로 구(口)자 형이 되기도 하고, 목(目)자 형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요컨대 이는 일본에만 해당하는 고유 양식이 아니라 동서양에서 고루 나타나는 보편적인 건축 형태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 남산 아래에 있던 시절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원래는 일본공사관으로 지어졌다가 한국통감부로 전환된 건물이었다. 그런데 보아 하니 이것 역시 '일(日)'자에 가까운 중정형 건축 양식을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본(本)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알려진 경성부청의 경우에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애당초 조선 사람들에게나 일본 사람들에게나 그러한 모양으로 인식되었다는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지금까지 드러난 것이라고는 일본 사람들이 남겨 놓은 <대경성>(1929)과 같은 안내 책자에 "경성부청은 '산(山)자형'의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인데, 외부는 화강석을 붙이고 인조석을 바른…" 운운하는 정도의 구절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경성부청의 설계자는 정작 이 건물을 '궁(弓)자형'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가령 <조선과 건축> 1926년 10월호에는 이 건물의 설계에 참여했던 총독부 건축과 기수 사사 케이이치(笹慶一)의 글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전부 한쪽에만 복도를 두었는데, 채광을 충분히 하고 또 민중잡답(民衆雜踏)을 완화할 만큼 충분한 폭이 되도록 하였고, 의장(議場)은 중앙 뒤쪽에 따로 설치하였다."

'경성부청사신축기념호'로 만들어진 이 건축 잡지에도 역시 '산자' 또는 '궁자' 모양이라는 얘기는 거듭 나오지만, 이것을 일컬어 '본자' 모양이었다는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누군가는 그네들의 속셈이 따로 있을진대 그러한 내용을 구태여 기록으로 적어 뒀겠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로지 식민통치자들의 권세만이 판을 치던 시절인데 정말 그러한 의도를 지닌 것이라면 그것을 구태여 숨기고 말고 할 까닭이 뭐가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꼭꼭 숨기고 있는 속내를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 <조선공로자연감>(1935)에 수록된 덕수궁과 경성부청 일대의 모습이다. 도로선을 따라 배치된 경성부청의 외형은 언뜻 '본'자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일본인들의 기록으로는 이것이 '산(山)'이나 '궁(弓)'자의 형태라고 적어 놓은 구절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또 다른 '일(日)'자형 건물은 1928년에 완공된 '경성재판소'이다.
그런데 사사의 글을 통해 흥미로운 단서 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경성부청의 설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으로 평면 배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서울시청도 그러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건물의 전면 외곽선은 부지 경계가 되는 도로면을 따라 죽 이어져 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평면 배치는 경성부청에 앞서 그 자리에 서 있던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해체되기 이전의 경성일보 사옥과 그것을 대체한 경성부청은 비록 건축 재료와 건물의 높이는 달라졌을지언정 적어도 전면에서 바라 보는 외형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느낌을 준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둘 다 부지의 경계선에 바로 붙여 건물을 지은 탓이라 여겨진다.

▲ 1916년 10월 1일에 재축성된 경성일보 사옥의 모습이다. 경성부청은 1924년에 이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지어 올려 1926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그런데 비록 건축 재료와 건물의 높이는 달라졌지만 둘 다 부지의 경계선을 따라 건물을 배치한 탓에 전면의 형태는 거의 그대로 닮았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경성부청을 의도적으로 '본자'의 모양이 되게 지었다는 논지를 읽어 내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사사가 적어 놓은 바에 따르면, "애당초 경성부청의 신축 계획안이 나중에 경성일보사가 옮겨간 위치(즉 지금의 서울신문사 자리)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은 1922년 11월이지만, 그 후 부지 선정의 후보지가 소공동의 대관정 자리, 남대문로의 남대문소학교터 등으로 그 위치가 바뀔 때마다 몇 번이고 배치도를 고쳐 그려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처음부터 조선총독부의 일자 모양에 맞춰 새로 짓는 경성부청을 본자 모양으로 하여 서로 짝이 되게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든지, 그 위치도 북악산에서 뻗어 내리는 지맥의 일직선상에 '구태여' 고집하여 배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 1916년 6월 25일에 착공될 당시에 계획했던 조선총독부 청사의 초기 도안이다. 그나마 이 건물은 10년의 세월을 넘긴 끝에 완공되었다. 불과 3년여 만에 부지 선정과 건물 시공까지 마친 경성부청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공사관여자로 봐도 그러하고, 건축 기간에도 상당한 시차가 있다는 점에서 두 건물의 상관 관계를 억지로 엮어 내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1912년 무렵부터 경복궁에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겠다는 계획을 입안하고 설계도 초안까지 다듬었던 것에 비추어 1922, 23년경에 와서야 부지선정과 건립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던 경성부청의 경우를 비교하면 상당한 시차가 난다. 때문에 거기에서 '일'자와 '본'자 모양의 건물을 배치하려는 일관된 의도성을 찾아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가령 경성부협의원이었던 타나카 한시로(田中半四郞)가 역시 <조선과 건축> 1926년 10월호에 적었듯이 "기왕에 신축할 바에는 충분히 훌륭하고 도회지의 상당한 중심 목표가 되는 그러한 청사, 즉 시가지를 원형이라 할 때 그 중심 위치에 놓일 수 있도록" 하려 했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나, 그 어디에도 경성부청을 '본'자 모양이 되게 배치하려 했던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요컨대 구태여 경성부청을 대한제국의 황제가 거처하던 덕수궁 앞에다, 그것도 덕수궁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로 지으려고 했던 그네들의 저의는 지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일컬어 조선총독부의 '일'자 건물과 짝이 되게 '본'자 형태로 배치하려 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어딘가 과장된 해석인 듯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인다면, 우연찮게도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가 모두 대칭형의 글꼴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일부 건축사학자들이 조선총독부의 평면도가 완전한 대칭형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지적한 적이 있다. 이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본자 모양을 그렸다는 경성부청은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우선은 경성부청의 동남쪽 날개는 도로 모양이 그러하고 또 출입구가 그쪽으로 나있는 탓에 상당히 짧은 꼴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그 대칭점인 서남쪽 모서리의 날개는 그 뒤편으로도 태평로를 따라 건물이 죽 이어지고 있는 탓에 길게 늘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경성부청은 외형상 대칭형의 글꼴은 아닌 셈이다. 만약 경성부청이 '본'자의 모양을 취한 것이었다면, 결국 완성된 건물은 한쪽 획수가 짧아져 이지러진 본자의 형태가 되는 것으로 어쩌면 그건 대단히 불경(?)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조선총독부 청사와 경성부청을 일컬어 '대일본' 형상의 저의를 담은 것이라는 속설을 꺼내는 것은 비록 간결하고 매우 인상적인 설명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를 다 믿어도 좋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논거가 거의 입증된 바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말하기 어려운 시절에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어려웠다손 치더라도 해방이 되고 나서도 왜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그러한 일제의 음흉한 저의를 증언하려는 기록이나 회고가 없었던 것인지는 참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던 차에 어느 날 '느닷없이' 대일본 형상에 관한 얘기가 기록으로 등장하고 또 이것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재확산되면서 어느새 모든 사람의 상식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90년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이 얘기는 즉시 그 시절에 한창 논란이 되고 있던 총독부 청사 처리문제에 있어서 '철거론자들'의 결정타가 되었다. 역사의 기록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과장과 왜곡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대일본 형상에 관한 속설 역시 아무리 봐도 우리 시대가 만든 대단한 '오버(?)'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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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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