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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의 낯선 젊은이들이 화분에 물을 뿌리며 의사당에 등장한다. 짙은 싱글 정장에 넥타이를 맨 수백명의 노신사들은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 잡히며 이 낯선이들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83년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펼쳐진 소위 ‘결정적 장면’이다.

그들의 자유로운 복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녹색정치를 표방하며 핵무기 도입 저지를 주장한 이들 낯선 젊은이들의 정체는 평화, 환경운동가였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독일 연방의회의 초선의원을 겸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1979년에 처음으로 선거에 뛰어든 이후 1983년에는 27석을 확보하며 독일 연방의회 진출에 성공한 독일 녹색당원들이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 있다. 바로 오늘(29일) 오후, 그는 공언한 대로 베이지색 면바지에 회색 컬러의 라운드 티셔츠와 남색 재킷을 입고 본회의장에 참석했다.

회의장을 돌며 예의 그 짙은 싱글 정장에 넥타이를 맨 여러 노신사들과 인사를 나눈다. 이때 이미 회의장 곳곳이 웅성거린다. 그가 단상에 서자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 나온다.

“요즘 넥타이 안 매면 골프장에도 못들어간다~”, “국회가 이게 뭐요, 국회가 난장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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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난장판이다’라는 외침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평상복 차림이라 하여 초선의원의 국회의원 선서를 막은 이곳은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이었다.

그리고 ‘국민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평상복 차림으로 감히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섰던 ‘새내기 의원’은 자칭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개혁국민정당)이었다.

의원선서가 진행되기 직전 한나라당 의원 20∼30명이 야유를 보내며 퇴장했고 선서는 내일(30일)로 연기되었다.

국회의원들이 하나같이 짙은 색 싱글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인지하는 것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또 국회의원의 공식 복장이 싱글 정장에 넥타이로 정해져 있는가 하는 것도 내 관심 밖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로부터 예의바른 행동과 말을 들어야할 당사자인 나, ‘국민’은 예의바른 복장의 그들로부터 전혀 ‘예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싱글 정장이 아닌 재킷과 면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같은 국회의원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퇴장하는 그들이 ‘예의’를 갖추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많은 국민들은 오늘 유시민 의원이 입었던 베이지색 면바지와 회색 컬러의 라운드 티셔츠 그리고 남색 재킷보다 어쩌면 더 남루하고 초라한 작업복을 입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 ‘국민’들 앞에 고급 싱글 정장 국회의원과 면바지 국회의원를 나란히 세워보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례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독일 녹색당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를 밝히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소위 신사회 운동이라고 부르는 반핵, 평화, 환경운동을 정치조직화한 녹색당이 1979년 유럽의회 선거전에 뛰어들 당시 선거 구호가 "자유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유"였다.

오늘 유시민 의원이 ‘국회의원 선서에 부쳐 드리는 말씀’에서 밝힌 '서로 다름에 대한 존중과 관용'과 상통하는 말이다. 민주주의와 열린 사회는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고 실천하는 곳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녹색당원과 유시민 의원 모두 옷차림에서부터,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실천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유 의원은 ‘ 불관용과 독선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것’임을 공언했다. 그의 싸움을 지지한다. 녹색당이 독일의 정치를 바꾸어 나갔듯이, 유시민 의원의 불온한 자유주의와 면바지가 한국의 정치를 바꿔나가기 바란다.

유시민 의원의 ‘국회의원 선서에 부쳐 드리는 말씀’

존경하는 박관용 국회의장님과 선배 의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양시 덕양갑 유권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께도 인사드립니다. 개혁당 유시민 의원입니다.

오늘 제 옷차림 어떻습니까. 일부러 이렇게 입고 왔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국회에 나올 때 지금 같은 평상복을 자주 입으려고 합니다. 혼자만 튀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넥타이 매는 게 귀찮아서도 아닙니다. 이제 국회는 제 일터가 됐고, 저는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싶은 것뿐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똑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습니다. 제가 가진 생각과 행동방식, 저의 견해와 문화양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들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의 것도 이해하고 존중해 주십시오.

'서로 다름에 대한 존중과 관용.' 이것이 이제 막 국회에 첫 발을 내딛은 제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용할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자기와 다른 것을 말살하려는 '불관용'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정활동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불관용과 독선에는 단호하게 맞서 싸울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과 의원님들 지켜봐 주십시오. 격려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3년 4월 29일
새내기 국회의원 유시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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