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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숙 여사
ⓒ 오마이뉴스 이승욱
1974년 4월 20일, 겨울은 물러갔지만 아직도 써늘한 기운이 새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새벽을 가르며 두 명의 형사가 도예종(당시 50세) 선생의 집 대문을 거침없이 두드렸다. "타-앙, 탕..."

아침밥을 준비하러 옷매무새를 다듬던 도 선생의 부인 신동숙 (74)여사는 낯선 이들의 방문에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바깥의 인기척에 안방에 있던 도 선생도 옷을 챙겼다.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도 선생님, 계시죠?...잠시 조사할게 있으니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불안해하던 신 여사를 안심시키려는 듯 도 선생은 아내에게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그들을 따랐다. 신 여사는 이 짤막한 말을 남기고 길을 나섰던 남편이 이승에서 마지막 길을 떠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집을 나섰던 도예종 선생은 이듬해인 75년 4월 9일,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주모자로 같은 혐의를 받았던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씨 등 8명과 함께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됐다. 대법원 판결 후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故 도예종 선생의 부인 신동숙 여사 인터뷰 / 정동헌 PD
정동헌PD는 대구지역 인터넷방송 GTV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형사들에 끌려간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

'사법 최악의 날'로 기록되고 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휩쓸려 도 선생은 그렇게 희생됐다. 현재 대구 달서구 송현동 허름한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는 신동숙 여사는 당시의 기억들을 한 조각도 버리지 않고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세월이 지났건만, 뼛속까지 파고들었던 억울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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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우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이건 (독일) 나찌스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니깐. 그렇게 선생이 잡혀가고 얼굴이라도 제대로 한 번 봤다면 억울하지나 않았제. 얼굴은 고사하고 편지도 못 오가게 했어."

신 여사는 변호사 접견조차 제대로 허용되지 않아 가족 면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 여사는 군사법정에 출두했던 남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며 기를 섰던 당시를 회상했다.

"선생이 법정 안으로 들어서고, 가족에게 얼굴이라도 보일 요량으로 고개를 돌리면 교도관이라는 사람이 호통을 쳤어. 재판도 다 마치고 헌병에 이끌려 가는 선생의 얼굴 한번 보려고 법정 문틈에 끝까지 달라붙어 있었는데,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봤어. 그게 끝이었어."

당시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신 여사는 분통을 터뜨린다. 말이 재판이었지 변론 기회조차 제대로 없었고, 시종일관 일방적인 추궁과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재판으로 신 여사는 기억한다.

▲ 신동숙 여사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를 회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군사재판소에서 재판을 했었제. 총칼로 무장한 헌병들이 서서 유족들을 감시했어. 재판정에도 가족들은 한 명씩 밖에 못 들어갔어. 도 선생도, 다른 선생님들도 헌병들한테 이끌려 재판정으로 들어왔제. 그런데 재판을 시작하면, 선생들은 '예' '아니오' 대답 밖에 못했어. 뭐라고 말만 하면 검사가 목소리를 높였다니깐. 선생들이 자신들을 변호하려고 치면 검사는 '이거 맛 좀 더 봐야겠네'라면서 노골적으로 윽박지르고….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재판이었다니깐. 그게 무슨 재판이야."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재판, 그게 무슨 재판이야"

당시 엄혹한 분위기는 재판정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을 접견하던 변호사들에게도 '압력' 행사는 부지기수였다.

"당시만 해도 변호사가 접견하는 것도 마음대로 못했지. 게다가 변호사 집에는 누군가 돌을 던지고 도망가며 위협도 했제. 그러고 나니 한 변호사는 겁을 덜컹 났던지 변호도 아예 포기했어. 솔직히 그 변호사한테도 얼마나 충격이었겠어. 그 변호사를 최근에도 만났는데 아직도 그때 협박받은 것을 말 못해. 정권이 몇 번이나 바꼈는데 말 한마디 못하는 거야."

재판이 진행될수록 '사형'이라는 불길한 그림자는 드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 누구도 선생들의 사형집행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이 가족들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때 형사들도 그러데. 이건 '정치적인' 사건이니깐, 조금만 지나면 풀려 날 수 있을 거라고 입을 모았제.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느냐'고 자기들이 먼저 이야기하데. 그런데 가족들이야 그렇게 죽이리라 생각도 못했지."

가족들은 선생들의 석방, 아니 사형이라도 면하게 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신 여사는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무기징역이라도 받아도 좋으니 사형은 면하게 해달라"며 애걸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기대는 대법원 사형확정이 판결이 난 후 하루만에 무너졌다. 75년 4월 9일 이른 아침, 새벽까지 여관방에 모여 재심 청구 등을 숙의하던 가족들은 다시 접견을 해볼 작정을 하고 교도소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교도관들의 "도둑놈의 가족들이 무슨 말이 많으냐"는 핀잔뿐이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9시쯤 라디오 방송을 타고 들려 왔던 한 토막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새벽 인혁당 재건위 사건 주모자 사형집행." 청천벽력 같은 사형집행 소식에 가족들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허탈감은 설마, 설마 하던 가족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사형집행도 방송으로 접해

고(故) 도예종 선생은?

1924년 12월 25일 경북 경주시 서악 출생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4.19 이전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강사
4.19 이후 경북 영주군 교육감 당선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3년형, 삼화건설 회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당시 51세)

/ 출처-대구경북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 대책위원회
신 여사도 믿기 힘든 이 날의 사형집행은 목관에 누운 남편의 싸늘한 주검을 보고서야 실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죽은 자에 가해진 고통은 남겨진 이들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있었다.

"형사들이 집 앞에서 죽치고 살았다니깐. '제발 눈 앞에 보이지 말아라. 내가 미칠 것 같다'고 소리를 지르면 물러가는가 싶더니…. 그 다음에는 이웃들을 하나둘 포섭하고는 뭐가 그리 걱정인지, 매일매일 날 감시했었어."

신 여사는 그 후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연좌제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줬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로부터는 "오히려 우리 피해가 더 크다"며 책망을 받고, 퇴직금은 고사하고 월급도 받지 못했다. 형제들의 냉대도 비껴 가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주변의 냉대를 겪는 이중고의 나날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2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역사의 정의는 살아 있는 것일까. 다행히 도 선생 등이 연루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독재정권의 정치적 조작사건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난해 9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발표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희생자 가족들의 눈물을 닦고, 답답한 가슴의 숨통을 트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하지만 신 여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의문사위원회, '조작사건'규정...
"그나마 다행...하지만 갈 길이 많다"


▲ 사진 찍기를 싫어했던 남편과의 찍은 몇 안되는 사진 - 이 사진은 1973년 2월 주민등록갱신을 위해 명함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에 들렀다 찍은 사진이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분하고 원통하던 것이 그나마 제대로 알려지게 됐어.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조작사건으로 인정받아서는 안돼.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당시 사건의 진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벌써 잊혀지고 있잖아. 또 이젠 선생님들의 삶도 재평가를 받아야 해. 그걸 위해선 유족들이 준비하고 있는 재심 신청도 제대로 처리돼야 하고…."

1950년대 당시 대구의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도 선생을 만났다는 신 여사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인도주의 삶'을 강조하고 민족의 통일을 강조했던 민족주의자로 남편을 기억했다.

"당시만해도 일제 소학교를 다녔다 보니 부부지간에도 일본말을 많이 썼거든. 그런데 일본말은 절대로 못 쓰게 했어. 그만큼 애국심이 앞서고, 이론적으로 항상 앞섰던 분이었어. 그리고 어떻게 되든 우리 민족은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소신으로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지."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 탓일까. 고 도예종 선생은 '억울한' 조작사건으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삶을 마쳤다. 신 여사는 이제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생각이 맞지 않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그것도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나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얼마나 억울해. 선생이 바랐던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었어. 다시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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