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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커피숍에서 만난 곽귀훈 씨. 그는 원폭 피해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했고 그의 말은 8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젊었다. ⓒ 오마이뉴스 이병한
곽귀훈.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와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로 어느 때보다 일본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의 이름은 이땅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올해 78세로 원폭 피해자다.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는 그곳에 있었다. 44년 징병에 끌려갔던 그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에서 약 2Km 지점 운동장을 걷고 있었다. 말 그대로 '머리위에' 원폭이 떨어졌지만 그는 핵폭탄인지도 몰랐다. 섬광도 버섯구름도 모두 똑똑히 봤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로부터 56년 후. 지난 2001년 6월 1일 곽 씨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중요한 승리'을 거뒀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곽 씨가 일본 정부와 오사카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곽 씨가 원폭피해자로 확인된 만큼 피해자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더라도 일본 정부는 원폭피해자 원호법을 적용해야한다"며 "오사카부는 원고 곽 씨에게 17만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의 의미는 크다. 시내 곳곳에서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던 8월 14일, 종로에서 만난 곽귀훈 씨는 일본 정부를 향한 과거와 현재의 '투쟁'에 대해, 그리고 이 판결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곽귀훈 재판 승소의 의미

일본 정부는 지난 68년부터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피폭자 원호법'을 제정해 건강관리 수당 등 각종 지원을 해왔다. 이 법의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피폭자임을 증명하는 '수첩'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수첩을 외국인에게는 발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71년 손진두 씨가 일본에 밀항으로 건너가다가 잡히자 '나는 원폭 피해자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 왔다, 나에게 수첩을 달라' 그랬어. 그러니까 그게 일명 '수첩재판'이야. 일본 양심들이 호응을 하고 결국 74년 초심부터 78년에는 대법원까지 다 이겼지. 결국 74년부터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 수첩을 발급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일본 정부 국장이 뭐라고 했냐면 '이 수첩은 일본을 나가면 효력이 없다', 즉 '통달 402호'를 내린 거야. 그게 지금까지 27년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가 이번 내 재판에서 무너졌지.

내가 지금까지 그 수첩을 8번인가 받았다. 78년에 처음 받았고 다시 한국에 오면 효력이 없으니까 내버리고 다시 받고 해서 8번을 받았어. 그러다가 지난 98년 5월에 다시 일본으로 가 수첩을 받고 치료을 했다. 한국 집으로 오면서 건강관리수당 다달이 36만원 정도를 한국 집으로 보내라고 했지. 그런데 일본을 벗어났으니까 안 줘. 실권됐다고. 그래서 재판을 건 거야. 도대체 무슨 법률상의 조목으로 실권이 됐느냐. 그것을 대라 이거였지."

- 이번 판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재판은 밑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전후 배상에 관한 것으로 그 부분에 바람구멍을 뚫은 것이야. 이 구멍이 앞으로 점점 커지지 좁아지지는 않을 거다.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 다른 재판과 달리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죠?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을 상대로 한 재판이 60여건 있었는데 거의 모두 졌다. 식민지에서 끌려왔다는 소리를 하면 그 재판은 십중팔구 져. 왜냐하면 일본 명치헌법은 천황이 하는 일은 죄가 안돼. 천만명을 죽였어도 죄가 안돼. 두 번째로 시효다. 벌써 56년이나 됐으니 너무 오래 지나버렸어.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은 쏙 빼버리고 단지 법을 대라, 무슨 법조문으로 일본을 벗어나면 실권이 돼서 안주는 것이냐를 따졌다. 그러니까 그쪽이 져.

나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어. '나는 패션모델이다'. 그러면 저쪽에서 귀가 쫑긋하거든. 아침에 (한국의) 집을 나설 때는 피폭자가 아니다. 재판한다고 점심 때 오오사카에 와서 등록을 하면 피폭자가 된다. 재판 끝나고 공항에서 나가면 또 피폭자가 아니다. 아침에는 피폭자가 아니고 점심에는 피폭자고 저녁에는 피폭자가 아니고, 그러니 그때그때 옷을 갈아있는 패션모델과 비슷하지 않느냐. 그러자 법관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고.

또 이렇게 말했어. 나는 법을 잘 모르는데 법(法)자를 보니 삼수(三) 변에 갈거(去) 자더라. 물이 간다는 뜻 아니냐. 이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바꾸자. 피폭자의 원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아니냐. 그곳에서 피폭을 당했던 사람이 한국으로 흘러가도 피폭자다. 미국으로 흘러가고 브라질로 흘러갔다고 해서 피폭자가 아니겠느냐. 피폭자가 일본에 있으면 피폭자고 한국으로 흘러가면 피폭자가 아니고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판사들이 그냥 듣고 넘어간 줄 알았는데 나중에 판결문을 읽어보니 내 말을 다 그대로 받아들였더라고. 판사가 그랬다. '원호법은 인도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인도적인 입장에서 돈을 줘라'. 두번째는 '나가면 효력이 없고 들어오면 효력이 있는 것은, 헌법 14조 평등·인권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 이거였다. 완승을 한 거지."


"다 죽었어, 원호를 못해서 다 죽었어"

ⓒ 오마이뉴스 이병한
- 일본 정부가 6월 14일 즉각 항소를 했습니다.
"원폭 피해자 70만명중 지금 수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29만명이야. 다 죽고 그 정도 살아남아 있는거지. 그런데 보통 70만명중 7만이 조선인이었다고 하지. 1할이야. 그러면 지금 남아있는 29만명의 1할인 2만9000명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약 2200명 정도밖에 없어. 다 죽었어. 원호를 안해서, 약도 못먹고 병원도 제대로 못가서 다 죽었어.

일본에서 항소를 한다길래 내가 종횡무진으로 싸웠다. 5개 당수와 법무부장관, 후생노동장관을 만났다. 그러지 말아라, 앞으로 대법원까지 5년을 더 재판하면 남을 사람이 얼마 없다. 항소하지 말아라….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 안중에도 없어. 죽도록 기다리는 거지 뭐. 그게 민족차별이야. 그것을 뚫으려고 싸우는 거야."

- 항소심은 언제부터 시작하죠?
"10월 24일."

-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재판관이 정신이 제대로 있으면 빨간 것을 희다고 할 수 없겠지. 또 단독심의면 뒤집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합의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상식이다 이 말이지. 안질 거야."

- 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마라. 예전에는 여권내러 다니는데 필요한 문서가 290페이지였어.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 하지만 한국 정부도 원칙적으로 피폭자 원호대책을 세워야한다."

- 피폭자 문제에 대해서 그 제조국이자 사용국인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처음에 이 운동을 시작할 때 '미국은 도의적인 책임을 져라'라고 해왔다. 중간에 효력이 없으니 말아버렸는데, 지금 일본에서는 피폭자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하려고한다. 그런데 우리는 뭐냐 이말이야. 일본은 전쟁을 시작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고 우리는 뭐냐, 옆에 있다가 개평으로 죽은 것 아니냐 이 말이야. 피폭자 협회에서 미국을 상대로 재판을 하려고 준비중이기는 한데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 요즘 일본을 규탄하는 감정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것을 알아야한다. 어제 보니 덮어놓고 손가락을 끊던데, 왜 손가락을 끊느냐 말이야. 그러면 일본 사람들이 용감하다고 그럴까? 아니지,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지. 그러지말고 이론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자 이 말이다. 합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일본사람들도 납득이 가도록 말야. 결국은 일본을 변화시키고 우리도 변해야 해. 우리가 민족의 긍지를 지켜면서 할 말을 당당하게 해서 저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절대로, 절대로 핵무기는 이 지구상에 있어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핵 군비 경쟁을 한다던지 핵으로 약소국을 위협한다던지… 그래서는 안된다. 왜? 핵무기는 무차별 도살이야. 한때 7만개가 넘었지만 지금은 줄어서 3만개 정도라는데, 그것 가지고도 지구상에 모기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일 수 있다. 핵무기는 절대 이 지구상에 있어서는 안된다.

궁극적인 목표는 핵폐기 운동이다. 다만 우선은 한국인 피폭자들을 사람대접 받게 해야겠다, 피폭자들의 권리·인권을 쟁취를 해야겠다는 것이 당면과제다. 목표는 핵폐기, 평화다."


인터뷰 후기

곽귀훈 씨는 특별했다. 그는 원폭 피해자이지만 무척 건강했다. 78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또한 원자폭탄을 맞고 상반신이 타버려 며칠간 혼수상태였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정했다. 핵에 노출됐지만 그의 표현대로라면 '구십구사일생'으로 몸속 백혈구도 파괴되지 않았다.

두번째로 대부분의 조선인 피폭자들이 자기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곽 씨는 사범학교 출신으로서 45년 9월 한국으로 돌아온 뒤 교사의 길을 걸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두루 거친 그는 89년 동대부고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그가 거친 학교 학생들은 누구나 그의 '피폭 특강'을 들었다.

세번째로 그는 무조건적인 반일감정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세대에서 흔히 엿볼 수 있는 '감정적인 반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득'을 이야기했다. 그의 나이는 80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무척 젊었다.

네번째로 그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대접을 받고 있다. 6월 1일 그가 재판에서 이기자 마이니치, 아사히,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뿐 아니라 산케이 신문까지 대서특필했다. 마이니치는 사설도 썼으며, 아사히는 사설에 정치면, 사회면 등 8개 면을 할애했고 판결문을 전문 실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고작해야 외신을 받아서 단신으로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이름도 '곽기훈'으로 틀리게 나왔다. 그것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78세 피폭자에 대한 한국언론의 '대접'이었다.

종각 앞에서 "포즈를 취해달라"고 말하자 살짝 웃었다. ⓒ 오마이뉴스 이병한
"67년 이후 거의 매년 방학 때 일본에 갔어. 일본 정부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일본사람과 똑같이 해달라고 요구했지. 궁극적인 요구는 보상을 받는 것이지만 지금부터 보상하라고하면 '이미 국교수립 때 보상이 끝났다'고 해서 소용이 없으니 최소한 일본 사람과 똑같이 해달라고 요구했어.

불쌍한 사람 많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또 나야 그깟 돈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이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끌려 갔지, 피폭 됐지, 방치 됐지, 난 그걸 '삼중고'라고 불러. 그래서 거지중에서도 상거지였다. 피폭자도 처음에는 문둥병과 같이 생각해서 상대도 안했줬어. 와서 보니 논이 있어 밭이 있어. 그러니 어떻게 살았겠어. 그래서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일본 대사관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죽은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게 죽는 것을 봤다. 참 피맺혀."

2200명. 5만명에 달했던 생존 조선인 피폭자가 모두 죽고 이제 그만큼만 남았다.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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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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