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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여, 눈을 들지 말라

서울의 지하철에서는 모두가 '고개 숙인' 사람들이다. 멍하니 구두코를 바라보는 사람, 신문지장에 고개를 박고 있는 사람. 핸드폰 잡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불한당 같은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도무지 활기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누가 이들의 고개를 숙이게 하였는가? '직장 일로 인한 스트레스'서부터 '산업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인간 소외'까지 문제는 다양한 차원에 걸쳐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범인은 따로 있다. 바로 지하철역의 미치도록 지루해빠진 벽, 천장, 바닥, 공공 포스터, 더 이상 짜증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일상적인 기계 소음! 거의 폭력적인 지루함이다. 부처님도 와서 졸다 갈 것 같은 건조한 지하철역의 분위기가 서울 시민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미건조, 개성말살의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을지로 3호선 벽화를 보는 상반된 시각

이처럼 마른 논바닥 같았던 지하철역의 분위기를 일찌감치 개선하고자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이 있었다.

을지로 3가 역.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을 갈아탈 수 있는 이 역의 환승 통로에는 원색의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서울시 주관으로 지난 해 열린 <미디어 시티 서울 2000>행사의 일환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의 제목은 '서브웨이 코믹 스트립(Subway Comic Strip)'. 환승로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설명이 조그맣게 걸려 있다. '(…)이 벽화는 다소 무료하고 지루한 그리고 답답한 환승용 지하통로를 활기차고 원색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작품 제목의 '코믹'이라는 말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시민들에게 한 번 웃고 지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겠다는 갸륵한 의도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가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걸까. 이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작품의 의도와 내용이 모두 훌륭하다는 의견이다. 지난 3월 10일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는 "지하철 벽화의 최고봉"이라며 이 벽화를 상찬한 바 있다. "날아가는 학이나 소나무 등 구태의연한 여타 지하철 벽화와 달리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벽화라는 데 점수를 준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환승로에서 내가 직접 만나본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환승로에 색다른 그림을 설치한 의도는 좋지만 그림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것.

"저는 여기 오늘 처음 왔는데요, 그림들이 불쾌하게 느껴지네요. 통일성도 없는 것 같고."(김동희·학생·23)
"글쎄…… 좀 무섭게 보이는 그림들이 있긴 해요. 일단 저희 애기는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으니까 좋아하거든요. 이런 그림('배고픈 돼지'를 가리키며)은 공공장소에 쓰기에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한정희·주부·30)

을지로 3가의 역무원들에게도 이 벽화는 골칫거리다. 혐오감을 주는 이 역의 벽화를 시정해달라고 청와대에 민원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청와대에서도 조사를 나왔다며 얼굴을 찌푸리는 직원들. 지하철역 내의 문제이긴 하지만 지하철공사는 아는 바가 없으며 '(벽화 그리겠다는) 서울시의 요구를 들어줬을 뿐'이라고 한다.

답답한 듯 한 직원이 얘기했다.
"우리가 봐도 그 그림이 이상하긴 해요. 엽기적인 그림이랄까. 전시장이라면 몰라도 공공장소에 그런 그림 걸면 안되죠. 시에서 빨리 철거를 해주는 게 우리도 편해요."

"어두움을 외면하기는 싫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지하철역의 분위기는 현재 지나치게 우중충하므로 개선이 필요하다. 이걸 개선하겠다고 지금까지 벽화들을 그려왔는데, 대개는 우중충함에 촌스러움까지 더한 결과를 낳아왔다.

둘째,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을지로 3가 역의 벽화는 분명 참신했다. "재미있다"는 긍정적 반응도 얻었다.

셋째,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림의 내용이 엽기적이라며 반대한다. 지루함은 덜었지만 대신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 지하철 역의 분위기를 바꾸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공공장소라는 특성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아직 남았다.

벽화를 그린 강영민 씨(화가·에니메이션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어두운 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의 현실에는 어두운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어두움을 외면하는 것을 저는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제 그림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메시지는 담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두움을 재미있게 표현해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결국 그가 시민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그림 보는 재미'였다고 한다. 재미를 위해 공포영화를 보러 가는 것처럼, 그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재미를 느꼈으면 했다는 것.

무심코 그린 벽화 한 장의 중요성

현재 이 벽화에 관한 '조사'가 진행중에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서울시청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러나 공공시설에 설치하는 작품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치가 서로 다르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밝고 희망차고 어디까지나 이해가 쏙쏙 잘 되는 작품만을 엄선해 설치할 것인지. 아니면 시민들이 받을 다소의 충격과 불쾌감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릴 벽화는 그려야' 되는 것인지. 좋든 싫든 매일같이 지하철을 이용해야만 하는 시민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무심코 그린 한 장의 벽화. 천만 서울시민들의 활기를 북돋워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짜증만 더하게 한다면 문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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