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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정리정돈이 하고 싶어지는 건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는 15년째 일본에서 살고 있는데, 날씨가 따뜻해지는 5월이 되면 유독 "이제부터 나는 미니멀리스트(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가 될 거야!"라고 선언하는 주변 사람들이 늘어난다. 

며칠 전엔 일본인 친구 하나가 '오늘 캬롯또로 묵혀뒀던 물건들을 싹 정리했다!'면서 내게 깨끗해진 집안 풍경을 사진으로 보내며 자랑해 왔다. 그러면서 차마 버리지 못해 늘 이것저것 쟁여두는 나에게 캬롯또라는 앱을 추천해 줬다.

아니 잠깐만, 캬롯또? 이거 어디서 들어본 건데? 영어 캐럿(Carrot)의 일본어 발음인 캬롯또. 그렇다. "당근이세요?"의 주인공. 한국의 국민 중고 마켓 '당근(구 당근 마켓)'이 내 주변 일본에도 상륙한 것이다. 알아보니 이 한국 기업이 일본에 서비스를 시작한 건 2022년부터인 듯하다.

신기하다, 비슷하고도 다른 알림음 '캬로♪'
 
당근이세요? 일본에 상륙한 중고 장터 `당근`
 당근이세요? 일본에 상륙한 중고 장터 `당근`
ⓒ https://karrotmark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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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마음, 아니 더 정확히는 궁금한 마음에 앱을 다운로드해 봤다. 가장 궁금했던 건 귀에 쏙 들어오는 '당근♪' 알림음이 일본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었을까였다. `설마 한국말로 당근! 하는 건 아니겠지?` 설정음을 재생해 보니 '캬로♪'라는 밝은 두 음절이 울린다. 

나에게는 이 당근 알림음에 얽힌 작은 기억이 한 조각 있다. 기억의 주인공은 한국에 계신 친정아버지다. 지난겨울 방학에 아이들과 함께 친정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버지 휴대폰에서 연신 '당근! 당근!' 하는 낯선 알림음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당근? 아빠, 이게 무슨 소리야?" 
"응, 이거 누가 쌀 주겠다고 글 올리는 사람이 있는데, 알림을 해둬서 그래." 


부모님은 십여 년 전부터 취미 삼아 텃밭 농사를 하고 계시는데, 텃밭 구석에서 닭과 기러기 등도 키우고 계신다. 처음에는 닭 한 마리 키우시나 보다 했는데 동물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지금은 어느새 수십여 마리의 닭과 기러기, 병아리들이 텃밭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동물들이 늘어나다 보니 사료값만 해도 만만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당근에는 벌레가 난 쌀이나 곡식 등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근 앱을 설치해서는 수시로 확인하고 계신 것이었다. 
 
부모님 텃밭을 어슬렁거리는 동물 친구들
 부모님 텃밭을 어슬렁거리는 동물 친구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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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누군가와 열심히 채팅을 하신다 싶더니, 급하게 나가 벌레가 난 쌀 한 포대를 안고 자랑스럽게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받아 온 쌀을 정리하며 혼잣말을 하셨다. 

"쌀을 어떻게 그냥 버려, 아깝게." 

아버지의 그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를까. 나도 슬며시 베란다로 나가 아빠와 함께 쌀알들을 쓸어 모았다. 

중고거래에 떠오른 아빠 생각

6.25 전쟁 직후, 가난한 시골 마을 5형제의 셋째로 태어난 우리 아버지. 그 당시 대식구가 먹을 음식은 늘 모자랐고, 쌀 한주먹에 물을 가득 넣고 끓인 죽이 주식이었다고 했었다.

밥그릇에 흥건히 담긴 물을 다 마시고 나면, 남은 쌀알들을 긁어 모아도 숟가락 하나가 찰까 말까 했다고. 그래도 퉁퉁 불은 그 쌀들을 입안에 넣고 오래 씹으면 그렇게 고소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었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말했다.

"아빠, 이렇게 아끼는 것도 좋긴 한데... 그래도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드시고, 이제 좀 그렇게 사셔." 
"그럼 그럼, 그렇게 살고 있지. 내 걱정 말고 너나 잘 챙겨 먹고... 아끼지 말고 누리면서 살아." 


아버지가 당근에서 받아온 벌레난 쌀을 정리하며, 늘 빚진 것 같은 내 마음을 주제넘은 잔소리로 입 밖으로 내봤더랬다. 

다시 여기는 동경. '캬로♪' 내 폰에 설치된 당근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버릴까 했던 딸아이의 작아진 신발을 모아 출품했더니 금세 구매 희망자가 채팅을 보내온 것이다.

거래 장소는 집에서 약 400m 떨어진 공원.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앳된 얼굴의 여자분이 한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버릴까했던 신발들을 당근에 출품해봤다.
 버릴까했던 신발들을 당근에 출품해봤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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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나는 뭐라고 말을 걸었을까?

정답은 "캬롯또데쓰까? (당근이세요?)"이다. 그렇게 나는 헌 신발들을 팔아 500엔(한화 약 4400원)을 손에 넣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괜히 가볍다.

그 옛날 우리 아버지도 지금 나처럼 기뻐할 아이들 얼굴을 떠 올리면서, 비닐봉지 한가득 간식거리를 사들고는 "아빠 왔다~!" 하고 외치셨던 것일까. 

우리 아버지가 젊고 건강했던 그때, 상록수처럼 늘 푸르고 든든했던 부모님 그늘 아래에서 무지갯빛 꿈을 꾸던 그 시절이, 가끔씩 사무치게 그립다. 

어쨌든 그 짠돌이 멋진 아버지의 딸인 덕분인지, 나도 야무지고 알뜰하게 돈을 벌었다. 일본에서의 첫 당근 거래, 이렇게 성공!

태그:#당근, #중고거래플랫폼, #그아빠의, #그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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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영화와 미학을 공부했습니다. 프리랜서 번역가. 동경 거주 중. Matthew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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