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는 내가 아끼는 몇 편의 영화 중 하나다. 1차대전에 참가한 파일럿으로 국가적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던 마르코가 주인공인데, 어째서인지 돼지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 축사에서 꿀꿀거리는 돼지는 아니고, 말하고 생각하는 건 사람인데 외양만 돼지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영화는 조국이 파시즘의 그늘로 빠져가는 가운데 마르코가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돼지가 되었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반쯤은 초연하고 반쯤은 포기한, 어딘지 달관한 자세로 살아가는 마르코. 영화는 냉소적인 태도로 일상을 사는 마르코의 모습을 서글프면서도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극중 마르코가 옛 연인이 운영하는 바에 들어서 술을 한 잔 하는 장면이 있다. 그곳에는 옛 친구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마르코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놈은 모두 죽는군."
어디 좋은 놈들만 죽겠는가. 모든 죽음 가운데서도 좋은 이들의 죽음이 유독 가슴에 박히는 것이리라. 운명을 주관하는 신의 멱살을 흔들면서 이 세상에 조금은 더 시간이 주어져야 했을 이가 있다고 외치고픈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난 시대의 지성을 떠올리며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역사가 진보한다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는 몇 가지로 나뉠 것이다. 진보하는 세상의 최전선에서 시대를 이끄는 자, 둔하게만 움직이는 세상의 중심에서 빛을 누리는 자, 나아가려는 시대의 목줄을 붙들고 어떻게든 주저앉히는 자 말이다. 진보가 인류의 나아갈 길이라면 무지한 대중을 끌어 어떻게든 한 발 더 나아가자 독려하는 피로하고 괴로운 길을 걷는 이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유명한 빅토르 위고며 볼테르 같은 이의 죽음에 수많은 민중이 경의와 애도를 표한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이 가운데 유독 아깝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시대의 지성이라 불러야 마땅한 삶을 살았다. 제국주의를 정면에서 맞닥뜨렸던 나쓰메 소세키의 시대가 가고, 2차대전 뒤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을 조명하고 미래를 도모한 일련의 작가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서구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들, 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쓰나리, 미시마 유키오, 엔도 슈사쿠,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과 차별화되는 냉정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특히 전후 고립을 자처하는 흔한 패전국의 자세에서 벗어나 국수주의가 아닌 평화의 주도국으로서 일본의 가능성을 타진해온 점은 오에의 특별함이라 해도 좋겠다. 민주주의며 평화를 설파하며 세계의 지성들과 활발히 소통하여 그에겐 사회운동가며 민주운동가, 평화주의자라는 평가가 따르기도 했다. 그러니만큼 오에의 죽음에 일본을 넘어 한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지성들이 슬퍼했음은 일견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만엔 원년의 풋볼>은 오에의 작품을 논할 때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이다. 1994년 노벨문학상 시상에서도 수상작 소개의 3분의 1이 이 작품으로 채워졌을 정도다. 내놓는 작품마다 본질적인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받은 그의 소설군에서 이 작품이 그 중심에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100년 전과 맞닿는 1960년의 인물들
소설은 일본 네 개 주섬 가운데 가장 작은 섬인 시코쿠, 그곳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을 배경으로 한다. 때는 전후 일미안보조약이 체결될 즈음으로,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이들의 소위 '안보투쟁'이 있었던 1960년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미쓰사부로는 삶에 대한 모든 동력을 잃어버리고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젊은이다. 그에겐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는데, 자식은 장애를 갖고 태어나 도저히 키울 수가 없는 탓에 시설에 맡긴 지 오래다. 그로부터 적잖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연유인지 아내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겉으로만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대단치는 않아도 번역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두었지만 미쓰사부로의 삶은 어딘지 대단히 위태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쓰사부로는 절친했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는다. 스스로 목을 맨 채 죽은 그 친구는 그저 목을 매고 죽은 것만은 아닌 기괴한 모습으로 발견되는데, 유서 한 장도 남기지 않아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죽음의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미쓰사부로는 친구의 죽음에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죽음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 채 제 삶을 깊고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힘과 거듭 대면한다.
소설은 미쓰사부로 부부가 미국에 유학을 떠났던 동생 다카시의 귀국을 계기로 함께 시코쿠 산골짜리 고향마을로 돌아가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미쓰사부로의 조상들은 대대로 그 마을에서 살아왔는데, 증조부는 마을 촌장이었고 증조부의 동생은 만엔 원년(1860년)에 있었던 농민반란의 주모자였음을 형제는 알고 있다. 귀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만엔 원년의 비극이 1960년대 현실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만엔 원년의 풋볼>은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꽤 긴 분량의 장편 소설이다. 어려서 남이 던진 돌에 눈을 맞아 한쪽 눈을 잃은 미쓰사부로는 주변에서 '쥐새끼같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추하고 유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그는 저를 그렇게 부르는 이들에게 공감하며 살아가는데, 소설 전반에서 그 나약함이며 패배감이 꾸준히 묻어나온다. 충격적인 모습으로 친구가 자살한 뒤 그의 주변엔 묘한 절망까지 맴돈다.
반면 동생 다카시는 1960년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 미국 방문을 위해 명목상이나마 전향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귀국 후 형 부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마을 안팎의 부랑자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만들고 마치 100년 전에 있었던 봉기의 주모자와 같은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일본 현대문학 가운데 흔치 않은 자기반성
소설은 그로부터 1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증조부와 그 동생의 모습을 미쓰사부로와 다카시에게 투영하며, 혹은 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의 행위를 살피며 차근히 나아간다. 형제의 대립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신 심리적이고 신경증적인 갈등으로 그려지는 점이 특색이며, 그 결말부에 이르러 드러나는 깊은 사연들이 개인의 삶을 넘어 그들이 공동체와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요컨대 소설은 일본의 지난 근대사가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남긴 상흔을 내보이며, 그를 극복하고 또 외면하려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절망적 분투를 그려내는 것이다.
<만엔 원년의 풋볼>은 그 대부분이 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려는 미쓰사부로의 관점에서 쓰여 그 심리와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난해하고 지루하게 읽힐 수 있다. 그럼에도 100년 전의 역사와 오늘을 결부시켜 탐구하는 작가 오에의 자세는 동 시대는 물론 일본 현대문학 전체를 아울러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입맛에 맞게 과거를 왜곡하고 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을 재단하는 이를 쉬이 만날 수 있는 2024년 가운데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제 못남을 기꺼이 드러내고, 제 종과 제가 속한 집단의 죄악들을 돌아보며, 그 구렁텅이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모색하는 소설의 용기는 일본은 물론 한국문학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자세라 할 것이다.
소위 신안보조약이라 불리는 일미안보조약은 그 뒤로 이어진 반세기 일본의 번영에 뿌리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세당한 국가의 주체성이 있음을, 또 그에 앞서 자행된 제 조국의 병든 가해행위가 있었음을 돌아보는 작업은 보통의 용기와 반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과연 한국 문학 가운데선 이와 같은 작업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돌아본다. 비슷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성격을 지닌 한미안보조약에 대하여, 또 외세의 침탈과 저항 아래 깔려 있던 꺼내놓기 부끄러운 기억들에 대하여 한국의 문학과 역사는 어떤 자세를 취해왔던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