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얼마 전 초등학생인 작은 아이가 내게 묻는다. 그걸 계기로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엄마, 우리 학교 임원선거하는 거 알지? 나 선거운동하기로 했어. 우리 반 수현이가 부회장 후보 등록을 했는데 공약이 마음에 들어서 돕기로 결정했어. 선거운동 기간 동안엔 엄청 일찍 학교 가니까 일찍 자야 해. 후보가 많아서 표를 모으려면 준비할 게 많아."

"몇 명이 출마했는데?"
"부회장 임원으로 출마한 아이들은 수현이, 민주, 기석이, 정원이, 도영이, 은아, 혜주...... 엄청 많아!"

"수현이 공약이 뭐길래 선거운동을 결심했어?"
"수현이는 학생들의 의견을 쌤들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는 우편함을 설치하겠다고 했어. 선배들이 계속 내놨던 공약이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었거든? 수현이는 우편함 위치가 문제라고 생각했어. 교무실 근처에 있으면 아이들이 쪽지를 넣기 어렵잖아. 도서관과 급식실 사이에 설치하겠다는 아주아주 현실적인 공약을 한 거지."

"수현이 다정하네. 그런데 넌 수현이보다는 은아랑 많이 친하잖아. 은아 공약은 별로야?"
"은아는... 급식실에 방송시청 모니터를 설치하고 도서관 옆에 간식코너를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근데 그건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아."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그럼 다른 학생들 공약은 어땠어?"
"기석이는 솔직히 공약이 좋아. 수현이랑 비슷한 의견소통함을 만들자고 했어. 그리고 요일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쌤들한테 함을 갖다 주겠다고도 했지. 그런데 우리 학교는 남녀 부회장을 따로 뽑으니까 기석이랑 수현이가 되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아이는 덧붙인다.

"정원이는 모든 교실 쓰레기를 책임지고 버리겠다고 했어. 그런데 생각해 봐. 학교 전체를 돌면서 쓰레기통을 비우려면 엄청 부지런해야 하잖아? 정원이는 자기 책상 청소도 힘든 애라고. 그리고 은영이는 솔직히 좀 실망했어. 부회장에 당선되면 햄버거를 돌리겠다고 해서 쌤들한테 혼났거든. 다른 공약도 다 장난스러워서 기억이 안 나."

초등학교 회장 선거는 어른들의 선거와는 달리 비방전이 없었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아이들은 공약의 실현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평소 개별반 학생들에게 친절한지, 수업 시간의 자세 같은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투표했다고 한다.

기권은 용납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든 투표에 참여해야 하는 것도 어른들의 투표와는 다른 점이었다. 
 
뜯어보지도 않고 구석에 두었던 것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개봉했다. 아이들보다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선거를 치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 투표안내문/선거공보 뜯어보지도 않고 구석에 두었던 것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개봉했다. 아이들보다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선거를 치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 임은희

관련사진보기


큰 아이 학교에서 화제가 된 어느 학부모의 출마 소식

한편, 큰 아이 학교 부모들로만 구성된 단톡방이 있다. 2023년부터 있었던 방이라 학교 독서모임 때 만나기도 했고 나름의 친분이 있는 곳이다. 얼마 전 그 방에서 선거와 관련한 큰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아이와 같은 학년의 서진이(가명)란 아이의 엄마가 모 정당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 선언을 한 것이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아니지만 축하할 일이니 응원의 말을 남겼다. 며칠 후 공천을 통과해 후보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 축하와 덕담 사이 조용히 다른 메시지들이 등장했다. 

"ㅇㅇㅇ님이 나갔습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단톡 방을 나가버린 사람들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이런 얘기가 불편했나? 정치가 뭐라고 이렇게 나가버리나 싶어서 슬프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첫째 아이가 말을 이었다. 서진이 엄마의 출마는 중학생 친구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였단다.

한편, 엄마가 당선되면, 그 친구가 지금 사는 서울에서 해당 경기 지역구로 전학을 가야 한다는 말에 친구들이 놀랐다고 했다. 아들은 묻는다, 당선되면 왜 이사를 가야 하느냐고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당연히 그 지역에 봉사를 해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 지역 주민이어야 하거든. 주소지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사를 가야 하니까 전학은 당연한 거지. 주소지만 옮기고 실제론 여기 남아있으면 '위장전입'이 되는 거고, 그러면 바르지 못한 정치인이란 오명을 쓸 수도 있으니까."

학교에선 선거를 주제로 계기학습을 진행했단다. 종로구 후보들과 정당들을 함께 검색하고 투표할 때 눈여겨봐야 할 부분들을 교사들이 가르쳐주었다고. 중앙선거관리위 후보자 정보공개 시스템(바로가기)을 활용해 병역, 전과, 재산 등 공약과 더불어 살펴봐야 할 부분까지 꼼꼼하게 훑어본 다음 현직 후보들을 검색해 후보 자질 검토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어른인 나의 선거는 어땠나
 
작은 아이 말대로 모두 코팅지로 되어 있었다. 재활용지를 쓰거나 친환경 잉크를 사용한 것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지역구 후보들 중 기후 공약을 제시한 후보는 168명으로 24.1%에 불과했다. 시민 3명 중 1명이 기후유권자라는 여론조사 결과와 대비된다. (출처: 기후정치바람)
▲ 친환경에 역행하는 공보집 작은 아이 말대로 모두 코팅지로 되어 있었다. 재활용지를 쓰거나 친환경 잉크를 사용한 것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지역구 후보들 중 기후 공약을 제시한 후보는 168명으로 24.1%에 불과했다. 시민 3명 중 1명이 기후유권자라는 여론조사 결과와 대비된다. (출처: 기후정치바람)
ⓒ 임은희

관련사진보기


아이들과 이야기를 마친 후 유권자로서의 나를 돌아보았다. 20대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가 게속 들면서 공약보다는 정치적인 분위기에 따라 투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공약이라고 생각해 공보물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ㅇㅇ당이 꼴 보기 싫으니 (반대 성향인) ㅁㅁ당을 뽑아야지'라는 생각으로 투표한 적도 있었다.

'사표를 만들지 말자, 될 사람에게 투표하자'는 말은 언뜻 들으면 투표권을 가장 효율적으로 행사하는 것 같지만, 실은 진지한 고민은 생략하고 될 사람, 즉 인기있는 후보에게 대충 투표를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될 사람에게 투표하자'는 말에 휩쓸려 투표했던 이후의 결과에 만족했는지를 떠올려봤지만, 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정치인들은 서로 자기가 적임자라고 떠들어대는데, 나는 마음 가는 정당이나 후보가 없어 투표 자체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마친 후 이번에는 제대로 투표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과 우리 지역구의 공보물을 살펴보았다. 아이들이 공약집을 주르륵 훑더니 말했다.

"전부 코팅지네, 환경파괴야."

"왜 돈을 나눠준다는 거야? 자기 돈을? 아니면 세금으로? 엄마, 이 사람은 체납액도 있는데?"

"이 후보는 소개책의 절반을 다른 후보 욕하는 데 쓰고 있어. 이러면 쌤한테 혼난다고."

"이 사람은 GMO 원산지 표시 의무화를 공약으로 걸었어. 아기가 셋이래. 대학등록금 무상 지원한다는 공약도 있어. 대학을 전부 다 가는 것도 아닌데 이건 좀 그렇다. 대학이 의무교육은 아니잖아."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권자인 내가 무심하게 넘겼던 것들을 아이들은 하나하나 살펴보며 마음에 드는 후보를 추려내고 있었다. 

사전투표를 마친 후 우리 부부는 각자 선택한 후보와 정당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작은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이 다른데 나중에 부부싸움 나는 것이 아니냐다가, 나중에 뽀뽀하고 화해하는 방법도 있다며 장난을 친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큰 아이는 어른스럽게 외쳤다.

"엄마! 비밀투표 몰라?"
 
 친구가 예쁜 선거 인증샷을 보내주었다. 제22 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율은 31.3%로 사전투표가 적용된 역대 총선 중 최고치를 기록했단다.
▲ 친구의 선거 인증샷  친구가 예쁜 선거 인증샷을 보내주었다. 제22 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율은 31.3%로 사전투표가 적용된 역대 총선 중 최고치를 기록했단다.
ⓒ 익명의유권자

관련사진보기

 
선거일인 내일 4월 10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개표방송을 보려 한다. 우리 지역구를 위해 봉사할 국회의원으로 누가 당선될 것인지, 어느 정당에서 비례대표가 나오는지 살펴볼 것이다. 개표방송을 보며 아이들이 어떤 재미난 이야기들을 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정치를 잘 기억하면 좋겠다. 성인이 된 아이들의 첫 투표일에는 파티를 하고 싶다. 각자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하며 함께 맥주를 마실 미래의 어느 선거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에겐 적어도 지금보다는 괜찮은 정치인들을 국회로 보낼 의무가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선배 유권자'니까. 부디 다른 어른들도 그런 마음으로 투표장으로 향하기를. 22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일은 4월 10일 내일, 투표 가능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학교임원선거, #선거, #투표, #소신투표, #제22대국회의원선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동자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