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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다녔던 수영장에는 이상한 관행이 있었다. 어떻게 선출된 지 모를 반장이 강습비 외에 강사 사례비, 회식비를 정기적으로 걷는다고 했다. 반장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고 내 친구는 가장 어린 회원이었다. 사례비도, 회식도 싫은 그 친구는 결국 멀리 있는 수영장으로 강습을 옮겼다. 

16개월 전, 나도 수영 강습을 시작했다. 친구와 다른 수영장이지만 혹시모를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냥 말을 안하기로 했다. 14개월 동안 계획대로 바닥만 보고 다녔다. 초급반은 수강생이 자주 바뀌고 바뀐 사람들은 다들 나랑 비슷했다. 늘 조용했다.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어서 놀랐다
▲ 핑크수모 정체를 밝혀라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어서 놀랐다
ⓒ 최은영(미드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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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에 중급반으로 올라왔다. 어르신이 대부분인 여기는 시끌벅적했다. 그 중 제일은 핑크 수모였다. 흰색, 검은색 수모 속에서 형광빛 쨍한 핑크 수모는 눈에 확 들어왔다. 목소리도 색깔만큼 쨍했다. 친구가 말한 반장같은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덤빌테면 덤벼라! 의 마음으로 바닥만 보고 다녔다. 

지난주 수영 강습 스피드 훈련 날, 선두에 선 핑크 수모가 갑자기 내 손목을 확 잡아끌며 "야, 니가 먼저 출발해!"라고 나를 본인 앞에 세웠다. 핑크 수모가 내게 한 최초 발화였다. 

"야? 야라고? 날 언제 봤다고? 당신이 우리 엄마 또래면 다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출발 호루라기가 울렸다. 쳇, 내가 당신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어! 

나는 중급반 맨 뒤에서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내가 더 빠르다는 걸 알고 나를 자기 앞자리에 세웠다. 그렇게 한 칸씩 앞으로 가다보니 어느새 2번이 됐다. 1번은 핑크 수모였다. 다른 회원들과 달리 핑크 수모는 절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역시, 나쁜 관행에 찌든 반장은 배려심도 없구나 싶어서 나 역시 입을 닫은 터였다. 선두에서 내 최대치 속도를 내봤고 핑크 수모와 반바퀴 차이 나는 걸 확인했다. 숨가쁜 와중에 자부심이 몰려오는데 핑크 수모가 벌개진 얼굴로 내게 또 말을 건다.

"재밌냐? 재밌어?"
"어.. 네? 네, 재밌으니까 하죠."
"어휴, 니 따라가느라 나도 덩달아 운동한다 야."


핑크 수모가 핑크 잇몸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다른 어르신도 같이 웃는다. 그 웃음에 자부심 대신 자책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따지고보면 중급반 두 달 동안 핑크 수모는 문제적 반장 노릇을 한 적이 없다. 이상한 관행조차 아닌, 그냥 친구네 수영장이 유별났던 게 아닐까. 

강습이 끝났다. 옷을 갈아입다 말고, 먼저 나가는 핑크 수모에게 나는 큰 소리로 "안녕히 가세요"를 외쳤다. 탈의실 모든 어르신이 1초동안 정지화면으로 나를 쳐다봤다. 다음부턴 옷을 반이라도 입고 인사하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핑크 수모의 핑크 잇몸이 다시 만개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너 결석 안 하더라? 다음 수업에도 나 운동 좀 시켜봐. 주말 잘 보내."

16개월 동안 이어진 묵언수행이 5분만에 깨졌다. 원치 않는 관행이 끼어들 틈을 안 주겠노라 다짐한 딱딱한 마음의 한 쪽 올이 슬쩍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관행이 없는 걸 봤는데도 왜 딱딱한 마음을 풀지 않았을까. '나는 중급반에 늦게 합류했지만 당신들보다 잘해요! 그러니 내게 말도 걸지 말아요!' 하는 오만함 아니었을까. 그래봤자 동네 수영장, 그래봤자 느린 열 바퀴도 간신히 하는 수준인데 말이다. 

친구 말만 믿고 유비무환 전투태세였던 내가 창피해졌다. 수영장 관행은 유비무환보다 무비무환이 더 어울렸다. 내게 선입견이 없었다면, 애초에 그냥 인사했더라면 핑크 수모가 갑자기 내 손목을 낚아챌 일도 없었겠다. 인사로, 미소로 부드러워진 관계가 어느날 스윽 나를 선두에 세웠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켜켜히 쌓인 오만함을 걷어내기 위해 한가닥 풀어진 올을 더 잡아당겨본다. 핑크 수모가 당긴 건 손목이 아니라 그 한 올인지도 모르겠다. 기왕 풀렸으니 다시 딱딱해지지 않게 완전히 풀어버려야지. 무비무환이 통하는 삶의 순간도 분명히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태그:#수영강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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