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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정원의 벚꽃
 병원 정원의 벚꽃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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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아산병원에서 2년여간 암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진료를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지 않다. 최근엔 대기시간이 줄었기 때문이다. 전공의 파업에도 외래진료는 예약시간에 맞춰 진행되거나 빨리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주와 이번주, 계속해서 항암주사와 CT검사를 각각 받았다. 이 진료는 거의 반복되지만 암환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천만다행으로 나의 항암일정은 지금까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의대증원 문제로 정부와 전공의 간 대치가 길어지는 와중에도 온전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나를 지켜주는 의사와 간호사 덕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보살핌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항암주사는 맞을 때마다 후유증으로 고생한다. 사실 항암주사보다 더 힘든 건 '기다리는 시간'이다. 항암주사는 아무 때나 맞는 것도 아니고, 채혈과 엑스레이 등 사전검사에 이어 그 결과에 대한 의사의 적절한 소견이 있어야 가능하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사 소견이 나와도 최소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주사제를 제조하는 시간이 또 필요하다. 약제에 따라선 2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기다림의 연속'이다. 

30여 차례의 항암주사로 최근 내 손등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예민해진 혈관은 주사시간이 다가오면 숨어버린다. 간호사는 주삿바늘을 삽입하느라 한참 애를 먹는다. 

내가 "괜찮아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도리어 미안해한다. 암병동의 간호사들은 지치고 힘든 나를 가족처럼 안쓰럽게 생각한다. 내가 "주사실 간호사님! 최고!"라고 엄지를 올리며 칭찬하는 이유다.
 
암병동 주사실
 암병동 주사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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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날 항암주사는 제시간에 마쳤다. 주사 맞기 전 기다리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항암주사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암환자의 예후를 살피는 정기적인 CT검사도 3~6시간 금식과 항암주사와 마찬가지로 채혈과 흉부 엑스레이 촬영 등 사전검사가 진행된다.  
    
사전검사 후 CT검사를 받기 전 얼마간 짬이 나 병원 밖으로 나가본다. 병원 앞 넓은 정원에서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이미 봄 내음을 즐기고 있다. 벚꽃과 개나리 등 봄꽃들은 저마다 자태를 보라는 듯 뽐내고 있다.
    
성큼 다가선 봄기운에 몸을 맡기며 암의 고통을 잠시 잊는다. 꽃들을 마주하면서 병원 오는 길이 스트레스가 아닌 여행 나온 길처럼 즐겁다. 내친김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라일락꽃에 코를 대본다.
     
얼마 전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꽃들이 모두 예뻐 보인다. 병원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따분하지 않았다. CT검사도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이상 빨리 끝났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예약 시간에 진료받는 건 이전엔 언감생심 바라기 어려웠다.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는 진료가 늦으면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진료가 예약대로 거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암환자의 마지막 부탁, 전공의 복귀를 기대한다
    
나 같이 각종 암으로 고통받는 암환자들이 요즘같이 원활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투병 의지와 용기도 곱절로 생길 것 같다.  
      
진료실과 암병원에서 나와 함께 치료를 받는 한 암환우는 "전공의 파업 이후 병원이 암환자와 중환자 치료에 집중하면서 암환자들에게 도리어 쾌적한 환경이 만들어짐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환자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다. 전공의들의 집단이탈로 달라진 병원 분위기는 암환자들에게도 '진료 중단'이라는 불안한 상황으로 언젠가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아산병원응급실
 서울아산병원응급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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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형병원에선 환자도, 보호자들도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암병원 일부 병동은 아직도 붐비지만, 병원 로비나 만남의 광장에는 사람들이 없어 썰렁하다. 예전의 병원 모습이 아니다. 오가는 전공의들도 거의 볼 수 없다.
     
지금 병원 운영은 거의 최악에 가까운 듯 보인다.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외래환자는 물론, 입원 환자들이 급감하면서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고 한다.  
    
급기야 대통령은 전공의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의대증원 문제에 대해 전공의들의 입장을 들어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전공의들도 대화에 응했다니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전향적인 자세를 기대한다.

대통령도 대화를 제안한 만큼 전공의들이 왜 사직서를 낼 정도로 우려하는지 그 목소리를 가감없이 들어야 한다. 전공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2천명 의대증원 재논의도 필요하다. 대통령이 본인 결단을 재논의한다고 해도 국민들은 충분히 수긍할 것이다.

전공의들도 증원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소아과와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분야와 지방병원의 여건을 살리는 의대증원에 찬성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도 전혀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전공의들이 무작정 반대만을 반대를 계속하면 환자와 보호자 나아가 의료계의 바람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제 의료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대통령과 환자를 지켜야하는 전공의들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환자와 국민, 의료계 모두를 고루 살리는 해법은 조금씩 양보하는 '대타협'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대의명분과 실리가 모두 들어있다.

무엇보다, 환자를 생각해 전공의들이 하루속히 병원으로 복귀했으면 한다. 의료현장을 떠받쳐온 전공의들은 이번 사태로 책임과 역할이 더 커졌다. 복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밝힐 수 있을 만큼 여건도 성숙됐다고 본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내부 공지를 통해 "오늘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다"고 밝힌 4월 4일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목련이 핀 나무를 지나 이동하고 있다.
▲ "병원에도 곧 봄이 올까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내부 공지를 통해 "오늘 윤석열 대통령과 만난다"고 밝힌 4월 4일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목련이 핀 나무를 지나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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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환자로서 전공의들의 애로를 현장에서 많이 봤다. 그들의 희생과 진정성도 믿고 싶다. 2년 전 신장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마친 뒤, 침상에서 견디다가 통증이 너무 심각해서 새벽에 결국 긴급 호출을 했다. 이때 눈을 비비며 달려온 레지던트가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환자님, 그 힘든 수술도 견디셨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곧 진통제를 투여하겠습니다."
    

이처럼 전공의들의 따뜻한 말을 의료현장에서 다시 듣고 싶은 게 투병 중인 암환자가 의사들에게 간곡히 건네는 부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전공의, #전공의파업, #전공의사직, #대타협, #전공의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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