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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바뀌면 풍경이 달라진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 차의 운전대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시속 60~80km를 유지하며 운전하는 것이었다.

내 기준으로 60km는 운전할 때 가장 안전한 속도다. 네비게이션의 갈림길 안내가 다소 헷갈려도 충분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누가 뒤에서 와서 작정을 하고 박지 않는 이상 내 실수로 사고가 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속도 속에서 뒷좌석 손님은 거의 집 쇼파에 앉아 있는 듯한 포근함을 느낀다고 믿는다.

느릿느릿 달리는 고급 차들
 
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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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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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도로에서의 주행은 60km를 디폴트 값으로 하고 고속도로에서는 80km를 맥시멈으로 생각하고 운전한다. 대부분 손님은 이 극세사 컨트롤과 포근한 알코올에 취해 10~15분 안에 곤히 잠이 든다. 잠이 든 손님을 보면 약간의 운전부심이 생겨 미소가 나온다.

갑자기 어떤 기억이 스쳤다. 고속도로 운전을 할 때 가끔 1차선인데 꽤 느리게 가는 고급 승용차들을 보며 답답했던 순간들이다. 제대로 밟기만 하면 내 차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쭉쭉 나갈텐데 왜 저렇게 느릿느릿 달리는 걸까, 생각했다.

늘 빡빡한 내 삶과 비견되는 느긋함을 보며 그 속사정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쌩 하니 추월하며 괜한 화풀이를 했던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문득 지금 내가 고속도로에서 그런 모습으로 달리고 있구나가 인식되었다.

액셀에 조금만 무게를 실으면 밟는 대로 쭉쭉 나가는 좋은 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꼿꼿하게 80km를 유지하고 있는 나였다. 그것도 습관을 따라, 1차 선에서. 급히 차선을 바꿨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내가 그렇게 답답해 했던 수많은 차들도 나와 같은 속사정을 가진 대리기사가 운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기사님은 어떤 이유로 그 운전대를 잡았던 것일까. 어떤 생각을 하며 그 밤을 달렸을까. 어디로 갔다가 어떻게 돌아오실 생각이었을까.

그 후로 밤에 거점인 잠실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가는 고속도로 1차선에서 느릿하게 달리는 차들을 보면 제법 너그러운 마음이 생겼다. 아니, 너그러움을 넘어 사랑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분명 대리운전을 하시는 분이실 거야, 멋대로 믿어버리고 부디 안전 운전 하시길, 많이 벌어서 들어가시길 바라며 미소가 지어졌다.

역지사지,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말은 언제나 쉽지만, 맘은 언제나 어렵다. 인간이 진정 역지사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바뀌어 보는 일이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상상이 아닌 다른 자리가 현실이 되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자리가 바뀔 때

편의점에서 일할 때, 빵집에서 일할 때, 마트에서 일할 때도 꼭 그런 경험을 했다. 손님 입장으로만 살아왔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물건을 사고, 몸에 배인 인사를 했을 뿐이다.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 자리에 놓여보니 풍경이 달라졌다. 계산을 하는 손님과 계산을 해주는 나 사이에는 고작 50cm 정도의 경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안과 밖의 온도는 몹시나 달랐다.

자연스레 을의 위치에 놓이게 되니 일종의 생존본능의 날이 바짝 세워졌다. 손님들에게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식이었다. 좋은 인상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능숙한 친절함과도 거리가 있었기에 내가 살 길은 인사 밖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인사를 했다. 반 정도는 대략 같이 인사를 했고, 반 정도는 무시하고 갔다. 그러려니 하고 싶었는데도 알게 모르게 쌓이는 거절감들에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하루의 한 명이라도 정말 인사를 반갑게 해주는 '친절한 손님'이 등장하면 그 모든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밤의 도로
 밤의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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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만 두어도, 그런 경험이 준 여운은 도무지 그만 둘 줄을 몰랐다. 그 후로 나는 쭉 인사 잘하는 친절한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닌, 내가 거기 있어 봐서, 그 마음을 알기에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그런 느낌을 받았을 리는 없지만,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내가 있었다면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시점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서 보면 온통 대리기사들만 보인다. 같은 동족이어서 일까, 정확하게 서로를 알아본다. 아직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는 눈빛, 핸드폰을 부여잡고 바라보는 간절함의 각도, 단단히 싸매었으나 단정한 하의와 이동에 용이하면서도 깔끔한 운동화,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메고 있는 옆가방.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다. 아니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자리가 바뀌니 보이게 된 것들이다.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오늘은 몇 건이나 하셨나요. 괜찮게 버셨나요.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힘내요 우리.

처음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대리운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은 돈도 돈이지만, 매일 밤마다 나의 주어를 확장해 주는 고마운 자리가 되었다. 실컷 밤을 헤엄치고 돌아오면 나는 분명 조금은 더 사람이 되어있다. 그래서, 요즘 나의 밤은 낮보다 확실히 아름답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같은날 연재 예정.


태그:#대리운전, #김대리, #달려라김대리, #대리기사,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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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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