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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매치가 알파고의 승리(4승 1패)로 끝나고, 대학교에서 바둑을 배우는 학생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AI가 인간보다 바둑을 더 잘 두는 시대가 왔습니다. 바둑 배워서 어떡할래요?"

학생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AI가 아무리 바둑을 잘 둔다고 해도, 바둑 두는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AI가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해도,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교사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배우는 즐거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교육이 지금껏 놓치고 있던 교육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모든 교사는 자신의 전공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수학 교사는 문제 풀이가 아닌 수(數)라는 세계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느꼈고, 영어 교사는 문법이 아닌 다른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움을 느꼈고, 역사 교사는 암기가 아닌 과거와의 끊임없는 소통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체육 교사는 신체활동의 결과에서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듯 각 교과를 '배우는 즐거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것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교사'고, '교사'여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 교육은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수포자를 만들고, 수업에 소외된 학생들을 만들까요? 의대 진학을 위해서라면 고등학교 자퇴도 서슴지 않게 만든 교육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체육 수업이 즐겁지 않은 이유
 
아나공 수업
▲ 아나공 수업 아나공 수업
ⓒ 이상욱(AI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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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운동을 누구보다도 좋아하지만 학창시절 체육 수업 시간에 교사에 의한 활동으로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아나공 수업'(아나 공있다, 알아서 놀아라!)이란 게 있었습니다. 제 어릴적 체육 수업 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농구공을 던져주고 그늘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저같이 운동을 사랑하고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수업이 아닙니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교사가 없더라도 똑같이 흐를 시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운동 경험이 적었던 친구들, 그래서 열정적일 수 없었던 친구들은 소외됐습니다. 그저 시간을 때울 뿐이었죠. 평가는 자유투였습니다.

이후에는 '획일적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농구 기능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주려고 합니다. 교사 한 명이 많은 학생들 개개인의 수준을 고려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정규분포상 중간값에 수준을 맞춰 수업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즐거운 수업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쉬운 수업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 어려운 수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인 교사라도 모든 학생들에게 충분한 피드백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평가는 자유투였습니다.

최근에는 혁신 학교를 필두로 '모둠 수업'을 많이 진행합니다. 획일적인 수업에서 나타난 한계점을 보완하는 시스템입니다. 보통 네 명이 한 조가 됩니다. 모둠에서 가장 능력이 좋은 학생은 나머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능력이 중간 정도 되는 학생들은 어느 정도 따라가지만 능력치가 가장 낮은 학생은 여전히 버겁습니다. 이때 교사는 이런 학생들에게 더 많은 피드백을 줍니다. 또한 교사는 모둠 안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고 있는지 학습이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을 합니다. 그렇지만 평가는 결국 자유투입니다.

즐겁지 않는 수업의 특징들
 
모둠수업 골대 아래 학생이 모둠의 다른 세 학생을 가르치고 있고, 교사는 뒤쳐진 한 학생에게 피드백을 주고 있다.
 모둠수업 골대 아래 학생이 모둠의 다른 세 학생을 가르치고 있고, 교사는 뒤쳐진 한 학생에게 피드백을 주고 있다.
ⓒ 이상욱(AI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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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 않은 수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수업이 삶과 관련이 없다. 농구는 내 삶에 어떤 의미인가요?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은 농구를 배우지만 몇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활동인가요?

둘째, 수업이 개별적이지 않다. 체육 수업에 학생이 20명이라면, 20개의 흥미와 20개의 난이도에 맞춘 과제가 필요합니다. 한 명의 교사에게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셋째, 수업의 평가는 결국 획일적이다. 신체 능력이 좋은 학생은 1만큼의 노력만 해도 만점을 받을 수 있고, 경험이 많지 않은 학생은 100만큼 노력해도 80점밖에 받을 수 없는 평가라면 좋은 평가일까요?

물론 어떤 체육 교사에게는 위와 같은 평가는 가혹합니다. 현장의 많은 선생님들은 너무 열정적이고, 교육 체제의 한계 내에서도 최선을 다해 가르칩니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여전히 학교가 따뜻한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즐거움'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의 방식은 바뀌어야 합니다.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3부작으로, 필자의 개인 블로그(브런치)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AI교육, #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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