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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하는 사람.
 서명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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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자동차를 장만하고 처음으로 보험에 가입했을 때다. 약관 속 자손·대물 등의 용어조차 몰랐던 시절, 보험설계사의 설명에 따라 두툼한 서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장을 찍어댔다. 약관의 내용을 모두 이해했다는 문장 뒤에는 어김없이 날인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군 생활 중 운전병 복무 경력이 보험료 할인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우연히 듣게 됐다. 여느 조건에 견줘 할인 혜택도 커서 가입 당시 20만 원 가까이 절감할 수 있다고 했다. 어리바리하던 사회 초년생이 이런 내용을 알 리 없었다.

곧장 해당 보험사에 증빙 서류를 제출하고 환급을 요청했다. 절차가 조금 번거롭긴 했어도 어렵잖게 해결이 됐다. 마치 길 가다 주운 돈 마냥 횡재한 기분이 들어 주변 지인들에게 한턱을 냈던 기억이다. 이후 허드레 물건을 살 때도 제품 사용 설명서를 꼼꼼히 챙겨 읽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개운찮은 뒷맛도 남겼다. 당시 보험설계사는 관련 내용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보험사는 흔히 볼 수 없는 사례여서 놓친 것 같다고 눙쳤지만, 쉽게 납득이 되진 않았다. 내가 아는 한 보험설계사는 일정 수당을 받고 고객의 편에 서서 권리를 챙겨주는 전문 서비스업이다. 거칠게 말해서, 피의자를 조력하는 변호인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객과 피의자가 약관과 법률 등을 스스로 일일이 살피고 챙겨야 누릴 수 있는 권리라면, 과연 보험설계사와 변호인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보험사는 고객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객의 권리가 무시됐다면, 그건 마땅히 보험사의 책임이다.

개운찮은 뒷맛, 또다시

20여 년 전의 경험이 새삼 떠오른 건, 유사한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어서다. 이번엔 민간 보험사가 아니라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다. 보험사가 고객의 권리 찾기에 앞장서야 하듯, 교육청은 교사의 권리 보장에 힘써야 한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고,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건, 우리가 귀에 못박이도록 들어온 이야기 아닌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동료 교사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그는 지난 8개월간 호봉 승급이 안 됐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호봉 승급은 급여·연금 등과 직결되는 문제다. 사전에 공무원 보수 규정 등을 숙지하지 않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탑재되는 인사기록과 급여 명세표 등을 꼼꼼히 챙겨보지 않은 그의 탓이라고 치부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너무 많다.

그는 임용되기 직전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석사 학위 소지자는 한 호봉 승급 대상이다. 무시험검정 자격 검정 규정에 따라 1급 정교사 자격을 취득한 걸로 인정돼 여느 교사처럼 교직 경력 3년 지나 이수하는 별도의 자격 연수를 받지 않아도 된다(참고로 교사로 발령받아 근무 중 학위를 취득한 경우엔 예외).

문제는 그가 1급 정교사 자격만 취득하면 호봉 승급이 자동 적용되는 줄로 알았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론 본인이 '직접 호봉 재획정 요구서를 학교 인사담당자나 교육청에 제출'해야 한다. 1급 정교사 연수의 경우엔 대상자 추천부터 연수 과정과 승급 절차에 이르기까지 교육청에서 공문을 통해 상세히 안내된다. 그 과정에서 해당 교사가 별도로 챙겨야 하는 일도 없다.

그가 승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연유도 당황스럽다. 한날한시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타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동기생들과의 우연한 대화를 통해서였다. 초임 시절 그들 역시 까맣게 몰랐다가 주변 동료 교사들의 조언을 듣고 스스로 '권리 찾기'에 나섰다고 한다.

스스로 권리 찾기 나선 교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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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인지, 교사들을 대상으로 보수와 호봉 승급 절차에 관한 교육청 연수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올해로 교직 경력이 26년 차인 나조차 관련 규정을 잘 모른다. 하물며 초임 교사의 경우, 용어도 생소할뿐더러 막 교단에 선다는 긴장과 설렘 속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

교육자로서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도록 한다는 취지로 개설된 교육청의 신규 임용자 대상 집합 연수 때도 이를 안내받은 기억이 없다. 교육정책 및 교육과정의 이해와 교권 침해 예방, 미래 교육, 학급경영의 실제 등 직무 수행을 위한 전문 역량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따름이다. 교사의 복지에 관한 내용은 뒷전이다.

그는 곧장 교육청의 문을 두드렸다. 신규 임용 때는 물론, 1정 연수 대상자 추천 공문이 하달될 때도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는 점을 토로하며 스스로 권리 구제에 나선 것이다. 담당자는 교육청의 안내가 미흡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규정상 소급 적용이 불가하다고 통보했다. 해당 교사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는 거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다.' 

뒤늦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호봉 승급을 위한 서류를 제출하고 나오면서, 그가 순간 떠올렸다는 경구다. '몰랐던 게 죄'라며 자책하는 모습이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릴지언정 아이들은 물론, 동료 교사들조차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만큼 실력이 출중하고 헌신적인 교사다.

지금도 그는 아직 배우고 싶은 게 많다며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매주 하루 야간 교원대 대학원 수업을 듣기 위해 퇴근 후 KTX에 몸을 싣고 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실천하고 있다. 배움을 향한 그의 열정은 고스란히 아이들을 위한 교육으로 녹아들 테다. 이 당혹스러운 소식에 그와 일면식도 없는 교사들이 함께 안타까워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의 자책과는 별개로, 규정을 들먹이는 교육청의 통보에 흔쾌히 수긍하긴 힘들다. 호봉과 승급 따위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수업과 생활지도에만 매진해온 청년 교사에게 너무나 매정한 조처라서다. 하루가 멀다 않고 교육자로서 능력과 자질을 함양하라는 연수에 참여하라고 공문을 뿌려대면서, '권리 위에 잠잔 네 탓'이라고 내모는 교육청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전가의 보도처럼 규정만 되뇌는 행태에 교육청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다. 교육청은 교사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허구한 날 부동산과 주식 투자, 연금 계산 등에 매몰돼 있는 교사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매몰돼 교사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면'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교육청의 '불가' 통보... 그러나

교사의 복지 향상이 교육력을 높이는 첩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별 교사가 마치 보험의 약관 같은 온갖 규정을 뒤져가며 권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건, 단언컨대, 교육력의 낭비이며, 교육청의 직무유기다. 교육청은 교사 위에 군림하는 옥상옥이 아니라, 교사가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도록 정책을 발굴하고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서비스 기관이어야 한다.

교육청의 불가 통보에도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 이유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동료 교사들은 이구동성 관행에 찌든 교육청의 무사안일한 행태를 꼬집었다. 교사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규정부터 들이미는 모습은 교육청이 교사의 복지에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여준다.

교사가 교육청의 장학사로 일하게 된 걸 승진으로 여기는 우리 공교육의 고질적 풍토에서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자책으로 멈춘다면, 교육청의 각성과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와 유사한 사례는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의 호봉 승급의 소급 적용 여부는 교육청이 교사의 권리 보호에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태그:#호봉승급, #호봉재획정요구서, #광주광역시교육청, #1급정교사연수, #무시험검정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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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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