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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노동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 노동은 무언가 유의미한 것을 생산하는 긍정적 경험이라기보다 빨리 끝나기를 원하는 부정적 경험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스스로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에서 노동이 긍정적으로 경험되긴 어렵다.

그러나 노동이 상품을, 임금과 이윤을 생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 계급'이 계급으로 스스로 정체화할 수 있던 때 노동을 통해 맺는 사회적 관계는 삶의 긍지이기도 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체성이 구현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은 고되고 위험한 노동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장이 되었다.

물론 오늘날 노동의 불안정화가 극심해진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의 실체는 크게 해체되었다. 게다가 19~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계급적 정체성의 폐쇄성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안정한 노동 속에서 원자화된 채 외로움을 느낀다면, 다시 노동이 고립을 넘을 사회적 관계를 생산할 수 있는지 되물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침 과거의 노동자계급에 깊은 애정을 지닌,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더 개방된 관계를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두 노감독의 영화가 개봉했다. 노동을 매개로 한 우리의 관계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지 질문하면서 말이다.

파편화된 노동에서 관계가 자라날 수 있을까
 
노동자라도 우연한 마주침 속에 관계를 만들어 가며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노동은 상품과 이윤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권리를, 환대와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 왔고 또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란 믿음을 보여주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노동자라도 우연한 마주침 속에 관계를 만들어 가며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노동은 상품과 이윤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권리를, 환대와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 왔고 또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란 믿음을 보여주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 사랑은 낙엽을 타고/나의 올드 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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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3부작'으로 핀란드 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렸다. 그의 최근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고전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가 해체된 시대의 노동자가 어떻게 만나고 사랑하는지 그린다.

헬싱키에 사는 안사와 홀라파는 노동을 통해 안정적인 삶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서비스 노동자로 일하는 안사는 관리자의 감시 속에 한 순간에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훌라파는 금속공장과 건설 현장을 오가지만 만성적 알코올 중독으로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불안정 노동이 과도한 음주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는 연구들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중독은 개인적 책임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며, 노동자 안전에 대해 회사가 책임을 전가하는 데 이용된다.

쓸쓸한 도시에서 원자화된 노동자들은 오직 라디오를 통해서만 세계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뉴스는 개인이 관계 맺는 세계도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물론 안사와 홀라파에게도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고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모으는 동료들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어울리는 가장 소중한 동료와도 서로의 성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로맨스의 관계는 자라난다. 두 사람은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가까워지고 멀어졌다 다시 마주친다. 감독은 단단하게 조직된 노동자가 아니라 세계에 원자화된 채 던져진 노동자라도 우연한 마주침 속에 관계를 만들어 가며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산업화 초기의 참상 속에서 노동자들은 금주 운동과 교육 운동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나은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노동의 파편화가 초래한 고난을 인정하면서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관계 속에서 삶에 대한 애정을 찾자는 것이다.

개방적인 환대와 연대를 생산할 노동을 위해

영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삶과 투쟁을 오랜 시간 동안 카메라에 담아온 켄 로치 감독. 그는 이번 작품에서 한때 노동의 공간이었지만 이젠 임금노동 자체로부터 배제된 공간을 담는다. 1980년대 대처리즘의 탈산업화와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 광공업도 노동조합의 기반도 쓸려나간 잉글랜드 북동부의 더럼을 말이다.

갑작스런 재난과 점진적인 건강 악화의 위험에 노출되는 노동임에도, 생태적 관점에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산업임에도, 영국의 광부 노동조합은 대처 정부의 일방적 정책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고 패배했다. 주인공 밸런타인이 자신의 펍 '올드 오크' 뒤편에 숨겨둔 홀엔 노동을 통해 관계 맺었던 광부들의 기억뿐 아니라, 지역의 재생산을 지탱해 온 여성들의 기억이 갇혀 있다. 파업하는 어느 노동자도 굶지 않도록 음식을 짓고 함께 먹으며 연대와 돌봄을 이어온 기억 말이다.

노동하고 싶어도 노동할 수 없는 공간에 시리아 내전을 피해 온 난민들이 도착한다. 그럴 때 혐오와 인종주의가 나타나는 건 우리가 수없이 보아온 광경이다. 올해 87세가 된 노감독은 때론 웅변적일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과거 노동자계급이 만들어 온 연대의 사회적 관계를 되찾자고, 그러나 새로운 마주침 앞에 더 개방적으로 구축하자고 외치길 서슴지 않는다. 지역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인 노동자들과 시리아 난민들은 오랫동안 닫힌 홀을 수리하여 개방하고, 소외된 그 누구라도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든다. 임금노동 바깥의 노동이지만 누구도 자신의 노력을 시혜적 자원봉사라 여기지 않는다. 서로를 살리고 스스로를 돌보기 위한 연대를 향해 노동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리아 난민들이 만든 '올드 오크'의 깃발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뛰어든 영국 노동자들의 깃발과 나란히 행진한다. 그 모습은 영국 노동자들의 역사에 대해 평생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바라본 노동자의 역사에서 노동은 상품과 이윤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권리를, 환대와 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 왔고 또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란 믿음이 드러난다.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이들의 노동이 만드는 사회적 관계를 보며 우리의 공동체를 재생산하는, 그러나 노동이라 불리지 않는 수많은 노동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장애인의 권리 자체를 생산하기 위한 권익 옹호 활동을 권리중심공공일자리로 인정하라는 중증장애인의 투쟁을 떠올려 본다. 이윤을 생산할 수 없다고 치부되어 평가절하된 노동들, 그러나 사회의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노동들, 그곳에서 파편화된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다시 만들어갈 순 없을까 생각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이재현님은 플랫폼 C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4년 2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사랑은낙엽을타고, #나의올드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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