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디디가 쓴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2024, 빨간소금) 표지.
▲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 표지 한디디가 쓴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2024, 빨간소금) 표지.
ⓒ 빨간소금

관련사진보기

   

 
"커먼즈(commons)는 영어 단어 '커먼(common)'의 복수형입니다. 커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형용사로 더 많이 쓰입니다. '공통의', '흔한', '평범한', '보통의'라는 간단한 뜻을 가지고 있죠. '보통 사람들', 즉 '민중'이라는 의미도 있고요. 아무튼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공통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커먼이라는 명사 혹은 형용사가 표현합니다."
(<'커먼즈(commons)'란 무엇인가> 책, 15쪽)
 
'공통의', '보통의', 또는 '보통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 '커먼(common)'의 복수형 '커먼즈(commons)'가 주목받은 것은 하딘(Hardin)이 쓴 논문부터다. 생물학자인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 제목은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mmons)'이다. 공동 소유 목초지에 소를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개인들의 이기심 때문에 땅이 황폐해진다는 예시로 유명하다.
 
이후 '공유지' 사유화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자주 활용됐다. 아직도 고등학교와 대학교 경제 교과서에서 자주 인용된다.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에도 나오지만, 그런데 원래 이 논문 주제는 '공유지'가 아니었다. '인구'였다. '인구 문제는 기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도덕의 근본적 확장이 필요하다'라는 부제가 하딘의 관심을 설명한다.
 
하딘 주장을 반박하던 오스트롬(Ostrom)이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커먼즈'가 다시 주목받았다. 그는 '제도화된 자원의 공동 관리'를 통해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은 사례들을 찾아내 발표했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오스트롬과 하딘의 주장은 '커먼즈'가 '자원'을 보고, "인간에 의해 관리되고 이용되는 객체"라고 인식하는 것에서는 같다(책, 43쪽).
 
"'공유지', '공유재', '공동자원' 등으로 번역되던 'commons'를 음역인 '커먼즈'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진 이유는 한편으로는 이 말들로는 커먼즈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라났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아직 커먼즈에 대한 공통의 이미지, 혹은 개념이 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책, 14쪽)
 
글쓴이는 라인보우(Peter Linebaugh),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의 논의를 따라 '커먼즈'를 "함께 섞고 나누는 활동, 즉 커머닝(공통하기)"이라고 정의한다(책, 15~19쪽).
 
'소유'에 갇힌 세계, 새 관계의 필요성
 
"자본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동시에 그 모두를 상품으로 만들며 확장했고, 이는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책, 43쪽)
 
최근 내가 사는 강릉에 몇 가지 눈에 띄는 일들이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슈퍼'라고 불리던 작은 가게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섰다. 언덕이나 작은 산이었던 곳이 어느 날 파헤쳐지고 그곳에 아파트와 건물이 채워졌다. 식당이나 카페, 병원 등이 함께 사용하던 무료 주차장에 어느 날 차단기가 설치되고 유료화됐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미 벌어졌을 것이다. 함께 사용하던 곳에 어느 날 울타리가 쳐지고 '출입금지' 팻말이 붙는 일이 늘어난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다. 내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돈을 내야만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도서관, 공공기관 입구에 버티고 있는 차단 장치는 온라인에서도 작동한다. '지적 재산권'이라는 제도적 지원을 받으며, 지식은 '보통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 그 지식이 소수의 힘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모두의 것(커먼즈)'임에도 사유화되어 팔린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한편으로 사적 소유의 지배와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소유의 지배, 즉 국가의 통제와 규제에 대립한다. …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저 모든 낡은 주장들은 누구도 공통적인 것을 관리하거나 보살피지 않는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달리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조직되고 유지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정남영·윤영광 옮김, 2014. <공통체>, 10쪽, 사월의책.)
 
'커먼즈(commons)' 또는 네그리와 하트 용어를 따르면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 만능은 아니다. 과거나 현재, 많은 공동체에서 '커먼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community) 상당수가 문화나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특히 약자를 억압했다. 이런 모습을 가족, 기업, 민족, 국가가 잘 보여주었고, 지금도 그렇다. 철저히 고립된 '개인'도 힘들지만, '같음'만을 강조하는 공동체 속 개인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DNA마저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커먼즈'도 자본과 권력의 포획('재 영토화') 대상이다. 자본주의는 권력을 동원해 '모두의 것'을 파괴하면서 세워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두의 것'(커먼즈)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기업이 협력과 관계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계를 완전히 벗어난 개인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협력인지, 어떤 관계인지를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커먼즈 운동은 경제(살림살이)의 목적을 이윤이 아닌 삶 그 자체로 되돌리는 동시에 우리 삶의 방식을 우리 스스로 창안한다는 (즉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자율적 공통체의 통치자가 된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삶을 그 자체로 존엄한 것, 살만한 것으로 복구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책, 137쪽)
 
상품과 소유라는 렌즈가 아니면 세상을 볼 수 없는 때에 사회를 다시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할 수 있을까? 세상과 존재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틀'을 만들 수 있을까? 글쓴이는 "더듬더듬 천천히" 시작하면 가능하다고 말한다(책, 249쪽).
 
그동안 인간은 모든 존재를 '나의 것' 또는 '우리의 것'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었다. 울타리에 들어 있는 존재든, 밖으로 쫓겨난 존재든, 모두가 삶터를 빼앗겨 몸과 마음이 황량해졌다. 오래된 습관과 언어 때문에 '새로운 관계' 만들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처절할 수도 있다. '혐오하던 세계'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긴 역사에서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이 이루어졌듯이,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새로운 연결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결을 끊고 새로운 존재와 접속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다면,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를 펴 보길 바란다.
 
"커먼즈가 어려운 이유는 … 우리가 여전히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커먼즈를 자원으로 여기는 근대적 언어와 습관에 갇혀 있기 때문이죠. … 동료들과 함께 무수한 시행착오를 해나가는 가운데 커머닝의 경험은 우리의 집단적 존재를 확장시키고, 우리가 걷는 방식을, 시공간을 느끼는 방법을, 우리가 사고하고 감각하는 언어와 몸을 조금씩 흔들고 균열 낼 것입니다." (책, 248~249쪽)

커먼즈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를 넘어서 삶의 주권 탈환하기

한디디 (지은이), 빨간소금(2024)


태그:#커먼즈란무엇인가, #커먼즈, #한디디, #COMMONS, #빨간소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