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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책을 다 읽고도 그 여운 때문에 책을 덮지 못한 게 얼마만인가. 잠시 마지막 장면에 머무르다 다시 뒤에서부터 앞으로 천천히 책을 넘겼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찾아 책 수다를 떨고 싶다.

얼마 전 지인의 추천으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소녀의 집에 곧 다섯째 동생이 태어난다.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는 아이의 부모는 자녀 중 한 명을 먼 친척 집에 맡긴다.

친척 집에 맡겨진 아이
 
맡겨진 소녀 앞표지입니다
▲ 맡겨진 소녀 표지 맡겨진 소녀 앞표지입니다
ⓒ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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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소녀가 아빠 차를 타고 친척 집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녀'라고 하면 보통 청소년기 여자아이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 책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나이인 것 같다.

소녀는 훌륭한 관찰자다. 아빠와 친척 집 아저씨가 만나 날씨와 물가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둘은 사실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소녀를 쳐다보는 아주머니의 눈동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소녀는 낯선 곳에서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p17)다.

불안한 소녀의 감각은 활짝 열린다.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바닥 타일 위로 길게 뻗은 아줌마의 그림자, 식사를 다 마치고 어서 떠나고 싶어하는 아빠. 독자는 소녀의 감각을 하나씩 따라가며 덩달아 불안해진다.

내가 일곱 살 때. 고모 집에 잠시 맡겨진 적이 있다. 단 이틀뿐이었지만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생각난다. 아빠와 함께 간 고모네 집에서 난 아빠를 찾지 않고 잘 놀았던 모양이다. 아빠는 "이렇게 잘 노니 아빠는 없어도 되겠다"라고 했다.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는지 크게 "응"이라고 했는지 어쨌든 아빠가 없어도 된다는 표현을 과장되게 했다. 이제 나도 많이 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었지 정말 아빠가 없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놀다 보니 아빠가 없어졌다. 장난이겠지. 곧 오겠지. 생각했는데 기다려도 아빠는 오지 않았고 난 울음이 터졌다. 두 명의 고모가 날 어르고 달랬지만 내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날 달래던 고모들은 지쳐서 '그래, 너는 울어라. 난 모르겠다'라는 상황이 되었다. 그땐 나도 정말이지 그만 울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첫 기억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가 떠올랐다.

난 뜬금없이 일흔도 넘은 아빠에게 전화해 물었다.

"아빠, 나 일곱 살 때 있잖아. 그때 왜 나 이틀 동안 고모네 집에 맡겼어?"
"어? 그런 일이 있었어?"


아빠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소설로 돌아오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펙터클한 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섬세하고 정교한 작가의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강한 매력의 마라탕이나 탕수육이 아니라 담백한 숙성회나 편백찜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처음 읽을 때, 두 번째 읽을 때, 세 번째 읽을 때가 다 다르다.

소녀는 친척 집에서 자는 첫날에 그만 오줌을 싸고 만다. 아주머니는 다음 날 아침, 소녀의 이불을 들춰보고 깜짝 놀라 말한다.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36p)

아주머니는 소녀와 함께 젖은 매트리스를 빤 다음 우리 둘 다 고생했으니 베이컨이라도 먹어야겠다며 식사를 준비한다. 아주머니의 다정함이 너무 따뜻해 그 장면에 가만히 머물렀다. 나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머니 같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냥 너무 감싸지도 너무 냉정하지도 않은 딱 좋은 적당한 다정함. 그런 지혜는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이런 다정한 이야기를 계속 읽다 보면 나에게도 다정함이 생길까. 생각 끝에 나는 그만, 올해는 다정함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게 노력으로 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겪어보지 못한 다정함

친척 아저씨의 지혜도 아주머니 못지않다. 슬퍼 보이는 아저씨를 보며 소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아저씨는 소녀에게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73p)

나도 주인공 소녀처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때가 많다.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나의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음' 하는 소리를 내어 내가 아직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를 한다.

그러다 시간을 더 끌면 안 될 것 같을 때, 상대방이 날 빤히 쳐다볼 때, 난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지껄인다. 충분히 여물지 않은 날 것의 말이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모아 둔 헛소리들을 가끔 친동생을 만났을 때 쏟아 놓는다. "내가 그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며칠 전엔 이런 헛소리를 했지 뭐야" 하고서.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아저씨의 말이 위로가 됐다. 이젠 그런 상황에서 입을 다물어야지. 헛소리 하는 가벼운 사람보단 재미없는 사람이 되길 선택한다.

집에서 다정함을 느껴보지 못한 소녀는 먼 친척 집, 낯선 곳에서 다정함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언젠간 집에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소녀는 다정함을 경험하지 않은 것이 나았을까. 엄마, 아빠가 무심한 사람이란 걸 모르는 채로 사는 게 나았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온전한 다정함을 경험한 아이는 분명 그 전과는 달라졌을 것이고 마음 안에 다정함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다정함을 품게 하는 사람. 우아, 정말이지 너무나 되고 싶은 사람이다.

이 책은 줄거리보다 행간에 숨겨진 감정과 작가의 다양한 표현에 감동하는 상황이 많아 줄거리를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짧은 소설이지만, 소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 어떤 장편 소설보다 많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쓰지 않는 까닭은 많은 분들이 책을 읽고 직접 감동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새해에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1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이라는 사실이 당신의 선택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은이), 허진 (옮긴이), 다산책방(2023)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태그:#맡겨진소녀, #클레어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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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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