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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기자말]
이 모든 여행의 시작은 어쩌면 '카르카손'이라는 보드게임 때문이었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소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는 길고 멋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의 성이 고풍스럽게 남아 있다. 보드게임은 이 성을 모티브로 한다. 규칙에 따라 지형 타일을 하나씩 깔아가다보면 게임마다 모양이 다른 성곽과 지도가 완성된다. 2명에서 4명이 할 수 있고 룰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흥미로워 가족끼리 하기 좋은 게임이다. 난 아들 우주와 카르카손에서 '카르카손'을 하고 싶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성벽의 모습. 놀랍게도 구글맵은 이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올라갈 것을 관광객인 나에게 추천했다.
▲ 카르카손 성벽 아래에서 올려다본 성벽의 모습. 놀랍게도 구글맵은 이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올라갈 것을 관광객인 나에게 추천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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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우리 가족의 보드게임이라고 할만 하다. 우주가 만 세 살 때, 가족끼리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였다. 먹을 것을 사러 대형 마트에 들렀다가 보드게임 코너를 발견했다. 대학시절 보드게임을 즐겼던 기억에, 복잡하지 않아 보이는 게임을 하나 집어든 것이 '카르카손'이었다. 물론 만 3세 아이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주는 게임을 이해하기도 전에 타일을 깔아가며 성을 완성하는 것을 즐겼다. 엄마와 아빠가 게임을 하며 티격태격하는 가운데에 같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규칙을 조금이라도 이해해가는 과정을 기뻐했다. 그렇게 '카르카손'은 우리의 가족 게임이 되었다.  
  
게임이 끝난 뒤 완성된 지도의 모습
▲ 보드게임 카르카손 게임이 끝난 뒤 완성된 지도의 모습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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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번 여행에서 프랑스 카르카손에 가고 싶어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카르카손은 프랑스 여행 코스에 넣기에 쉬운 도시는 아니었다. 프랑스 남단 피레네 산맥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툴루즈, 남쪽으로는 스페인의 지로나와 가깝다. 프랑스 통상 여행책은 파리 중심과 남프랑스 중심으로 테마가 갈리곤 한다. 대도시의 뜨거움이냐, 소도시의 고즈넉함이냐.

하지만 깐느나 니스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프랑스 코스에도 카르카손은 빠지기 일쑤였다. 그만큼 위치가 애매한데, 막상 가보면 고성을 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니스로부터 직접 렌트해서 운전을 할 게 아니라면, 서쪽 툴루즈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당일로 다녀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남동부 니스 카니발에 참석했다가 남서부 툴루즈로 날아가서 당일로 카르카손에 다녀오는 여행 스케줄이 과연 적절한가.

그러나 니스 카니발도, 카르카손도, 우주와 같이하는 여행에선 너무나 중요했다. 축제의 가운데에 있는 것도, 우리 가족 보드게임의 배경지에서 그 게임을 해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 하루들은 다른 하루들과 같지만 또 아들과 내가 영원처럼 되새기게 될 날들일 터였다. 이동의 최적 코스와는 거리가 먼 지그재그 형 경로가 되어버렸지만, 저가항공을 적절히 이용하면 될 것이다.
 
전망 좋은 언덕에서 바라본 니스 해변. 아래 그림과 비교해볼 수 있다.
▲ 니스의 전망대 전망 좋은 언덕에서 바라본 니스 해변. 아래 그림과 비교해볼 수 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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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처럼 세상을 가로지으며 살면 어땠을까

덕분에 니스 스케줄에서 여유가 생겼다. 축제 관람 전후로 시간이 남은 것이다. 우린 그 시간을 아들과 나는 작은 미술관이나 해변의 카페를 찾으며 보냈다. 니스에는 샤갈 미술관, 르누아르 박물관, 마티스 미술관 등이 있었다. 그 중 마티스 미술관은 휴관 중이라 샤갈과 미술관과 르누아르 박물관에 들렀다. 미술관들의 규모는 대도시의 그것과는 다르게 아담했다. 평화롭고 조용했다. 제주도의 미술관들이 생각났다. 김영갑 갤러리 같은.
  
그림 앞에 서 있으나 앞으로 갈 곳에 대한 경로를 검색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소년
▲ 샤갈 미술관에서 그림 앞에 서 있으나 앞으로 갈 곳에 대한 경로를 검색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소년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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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연인으로 유명한 샤갈의 그림에는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이 있다. 이미 나에겐 마드리드 티센 미술관에서 본 '수탉' 덕분에 이 여행의 상징적인 순례지로 온 기분이었다(관련 기사: 애를 업었을 뿐인데 미술관 가이드가 웃기 시작했다 https://omn.kr/2566r).

샤갈의 작품은 작가의 개성이 강렬하면서도 스스로를 내세우고자 하는 자의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움이 있다. 어찌보면 동화책의 일러스트와도 같은 흐름에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종교 테마의 그림이 많아서 그런지, 작은 프랑스 시골마을의 교회당에 온 기분이었다. 실제로 미술관 한 쪽 강당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피아노에서 누군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 오늘 밤에라도 이 강당에서 작은 공연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연 연습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피아니스트
▲ 니스 박물관 안쪽 입장이 되지 않던 강당 공연 연습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피아니스트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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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자화상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검은 바탕 위에 흰색으로 윤곽을 잡은 이 그림에는 할아버지가 된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찍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그림의 배경이 검은색이라 반사가 심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반사를 줄일 요량으로 나의 그림자를 이용하다보니, 그림 속 샤갈과 나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잠시 생각했다. 샤갈처럼 작업하고 샤갈처럼 살아간다면 어떨까. 프랑스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샤갈은 러시아에서 출생하고 자라고 학교를 다닌 러시아 사람이다. 세상을 넓게 가로지르며,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을 그려온 화가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일단 샤갈은 100세에 가깝게 장수했으니, 그처럼 오래 꾸준히 작업해나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운 삶이다.
  
반사를 줄이기 위해 움직이다 그와 나의 실루엣이 겹쳐졌다.
▲ 샤갈 자화상 앞에서 반사를 줄이기 위해 움직이다 그와 나의 실루엣이 겹쳐졌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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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박물관은 르누아르의 집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작품 수는 적지만 20세기를 전후한 프랑스 남부 저택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좋다. 마당의 올리브 나무들을 보다보면, 나라도 캔버스를 들고 나가 소용돌이 치는 나무와 구름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진다. 인상주의 화가인 르누아르의 그림 역시 따뜻하다.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날씨와 햇살이 이들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던 걸까.
  
올리브 나무로 가득한 마당과 멀리 보이는 니스 도심
▲ 르누아르 박물관 발코니에서 바라본 전경 올리브 나무로 가득한 마당과 멀리 보이는 니스 도심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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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주보다 더 어렸을 때 다니던 소아과 병원에는 르누아르의 <물뿌리개를 든 소녀> 그림이 걸려있었다. 진료를 받으며 그 소녀를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20년 후 그 병원에 어쩌다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그 기억이 문득 떠올라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그 그림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내겐 그 그림의 따뜻함이 병원의 차가운 이미지를 다스리는 느낌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이 깃든 그림. 르누아르 박물관에 있는 그림은 아니다.
▲ 물뿌리개를 든 소녀 내 유년의 기억이 깃든 그림. 르누아르 박물관에 있는 그림은 아니다.
ⓒ 오귀스트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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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따뜻한 그림을 그린 르누아르는 말년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온 몸에 마비가 오는 고통을 참아가며 그림을 그렸단다. 왜 그렇게까지 그림을 그리려 하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박물관에는 그의 작업공간이 남아 있다. 벽면에는 그가 바로 이 공간에서 작업하던 순간의 기록 영상이 영사되고 있었다.
  
실제 작업실 벽에는 그가 작업하던 기록 영상이 영사되고 있다.
▲ 르누아르의 작업실 실제 작업실 벽에는 그가 작업하던 기록 영상이 영사되고 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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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는 르누아르의 가계도도 있다.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장 르누아르.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르누아르는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이다. 영화 예술은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의 짧은 영상들로부터 탄생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41년생, 장 르누아르는 1894년 생이다. 화가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늦게 얻은 아들이 새롭게 탄생한 예술 형태에 매료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박물관 전시 사진 중.
▲ 작업하는 르누아르 박물관 전시 사진 중.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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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우버를 타는데 우주가 약간 울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발 끈이 뜻대로 잘 안 묶여서였지만, 피곤해서이기도 하리라. 아이가 우는 게 민망해 기사와도 한 두마디 나누다 보니, 어릴 적 프랑스에 살던 얘기도 꺼내게 됐다. 즐겨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는데 우버 기사도 생각이 같았다. 혹시나 해서 나이를 물어봤더니 나와 동갑이었다. 공립학교를 다니며 지상파에서 보여준 프로그램 내용을 가지고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며 노는 비슷한 시절을 보냈을 사람이었다. 반가웠다.

우주는 커가고 있다, 넓어져가고 있다  

우주는 흥분이건 짜증이건, 이제 제법 자기 감정을 빨리 수습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여행이란 환경이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빠의 보살핌도 대충대충이다. 그 대신 우린 이제 카페에서 잠시 각자 일기를 쓰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아주 잠시, 이긴 하지만 분명히 아이는 커가고 있다. 넓어져가고 있다.
  
2월이지만 봄 같다.
▲ 르누아르 박물관 마당 풀밭에서 2월이지만 봄 같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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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이번 여행에서 아쉽게 빠진 코스에 대해서 다음 여행에서 보충할 계획을 세운다. 같이 오지 못한 엄마에게 보여줄 것들을 계획한다. 우주에게 다음 여행이란 다음 방학과 동의어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이런 여행의 기회는 살면서 몇 번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원대한 계획을 너무 깨버리진 않기로 한다. 미래의 여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지금 우주의 여행의 기쁨은 배가 되고 있기에.

툴루즈에는 밤에 도착했다. 우리가 묶는 숙소는 생텍쥐베리가 이용했다던 호텔이었다. 비행기 조정석에서 하늘을 보는 듯한 사진이 프린트된 벽지가 붙어있었다. 난 <어린왕자>의 은유를 떠올렸다. 아들은 생김도 취향도 성품도 나와 제법 다르다. 그래서 '분신'이라는 느낌보다는, 어린 왕자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소년과 동행하는 기분이 든다. 이제 난 생텍쥐베리가 되어 어린왕자에게 카르카손의 성을 안내해줄 참이었다.
  
숙소 방 벽면의 사진과 글귀. 앙투안느 드 생텍쥐베리
▲ 당신의 삶을 꿈처럼 만들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라. 숙소 방 벽면의 사진과 글귀. 앙투안느 드 생텍쥐베리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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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고속버스는 설렌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 고속버스에 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들을 우주는 가장 즐긴다. 워낙 교통편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로그인하는 기분이기도 하리라. 우리는 한 시간을 달려 카르카손에 도착했다.
  
뾰족한 지붕이 특징이다.
▲ 카르카손 시내 위로 솟아오른 카르카손 성 뾰족한 지붕이 특징이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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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에서 내려 구글맵을 따라 걸어가니 조용한 소도시 뒤로 고성의 윤곽이 떠올랐다. '오래된 다리'라는 고유명사의 다리 위에 올라서니 아침의 아스라한 햇빛을 역광으로 한 카르카손 성 전체의 위용이 보였다. 우린 드디어 이 여행의 테마가 된 곳에 도착한 것이다. (계속)
 
시내에서 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전경이 보이는 시점에 찍었다.
▲ "오래된 다리" 위에서 바라본 성의 전경 시내에서 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전경이 보이는 시점에 찍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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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프랑스, #카르카손, #니스, #샤갈,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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