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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 연말 연초는 내게 큰 의미가 없다. 그냥 나이 한 살 더 먹는 정도일 뿐이다. 송년회, 시무식도 회사를 다닐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소속이 없으니 연례행사에 참석 안 한 지 몇 년은 된 것 같다. 그러다 올해 소속된 회사가 생기면서 12월 28일 송년회에 참석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시간은 점심이었다. 어차피 출근해서 점심을 먹으면 될 테니 간단해서 좋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사실 송년회로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것도 편하진 않다. 게다가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회식을 하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저녁 회식을 할 때면 푸짐한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집에 돌아와 다시 밥을 먹었으니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불편한 자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번 송년회는 점심이라니. 저녁시간이 아니라 다행이고 시간이 짧을 거 같아서 좋았다. 한편으론 송년회치곤 조금 시시하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송년회라면 보통 시끌 벅적 그해에 못다 한 회식을 총 망라하는 모양새라 저녁 때 하기 마련이고 건배사와 떼창 구호가 난무하고 평소와는 다른 메뉴로 주류도 상당히 포함된다. 적어도 2차를 가면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 슬금슬금 알아서 빠져나갈 정도였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지각하는 사람들이 꼭 있는데 상사는 그 직원을 콕 집어 핀잔하며 주의를 줄 뿐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회식비가 회사 돈이 아닌 모임 회비로 지불해야 할 때는 주류파와 비주류파가 회비를 공평하게 내는 것이 맞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술을 꼭 권하는 사람이 있는데 싫다고 해도 지지 않고 권한다. 분위기 깨지 말라며 애원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거절한다. 한 번은 내가 술을 너무 안 마시니까 괘씸했는지 술 한 잔을 마시면 십만 원을 주겠다는 내기를 했다. 모든 직원들이 나를 집중했고 상사는 현금 십만 원을 바닥에 꺼내 놓았다.

백세주면 해볼 만하다며 동료는 부추겼다. 분위기에 휩쓸려 제안을 수락했다. "맛보지 말고 한 번에 꿀꺽 삼켜야 돼 " 동료는 팁을 주면서 꿀꺽을 강조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난생처음 술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2차로 노래방에 끌려간 기억이 있다. 늦은 시간까지 자리만 채우고 있는 기분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송년회 문화가 점점 바뀌고는 있지만 '그래도' 점심 송년회라니 처음이다. 점심을 아무리 거하게 먹는다 해도 제한시간이 있으니 자리만 채운다 해도 길지는 않을 것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평소 같으면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할애했을 국장님 말씀은 송년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는지 30분 정도로 짧게 하고 끝을 냈다. 11시가 채 안 되었다.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인데, 뭘로 시간을 때우나 괜히 혼자 걱정하고 있는데 한 팀장이 게임을 한다며 진행자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팀장님이 레크리에이션 강사도 아니고 나는 아직 동료들과 어색한 사이인데 게임이라니. 어설펐다간 분위기만 더 썰렁해질 텐데 내심 점심 한 끼 먹는 것보다 더 어색할 거 같은 긴장에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그러나 게임은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데 최적합 놀이였다. 낯선 사람과도 동지가 된다. 게임하면 본성이 드러난다고, 나서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지 했던 서먹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게임에 열 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송년 이벤트로 게임은 신의 한 수였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

다양한 게임이 있었지만 '몸으로 말해요 속담 맞추기' 게임은 단연 최고였다. 5인 1조로 선두가 속담을 몸으로 표현하면 이어서 전달하고 마지막 주자가 속담을 맞추는 건데 예전 TV 가족오락관에서 했던 바로 그 게임이다.

그 당시 TV로 볼 때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게임으로는 최고의 웃음폭탄이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괴이한 몸짓을 볼 때면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된다.

놀랍게도 우리 팀은 다 맞혔고, 상대팀은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 승리 기념상품을 받았는데 진팀도 같은 선물을 받았으니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놀이였으리라. 나는 용감하게도 다음엔 MVP를 선정하라는 추가 주문을 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점심 송년회로 준비한 음식. 거창하지 않지만 호불호 없는 근사한 메뉴다.
▲ 분식 뷔페 회사에서 점심 송년회로 준비한 음식. 거창하지 않지만 호불호 없는 근사한 메뉴다.
ⓒ 전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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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외부로 이동하는 번거로움 없이 회사 안에서 먹었는데 호불호 없는 K분식으로 구성된 뷔페였다. 먹을 만큼 가져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아주 편하게 먹었다.

과일 디저트에 샐러드 빵까지 부담 없이 먹기에 손색없는 메뉴다. 음료도 술대신 탄산수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는 아주 신박한 점심 송년회다. 게임과 분식의 조합 이런 송년회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얼마 전, 분식집에서 송년회 하면 이상하냐고 질문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고물가를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만 '그래도' 송년인데 라는 마음에 결국 고가의 메뉴를 선택했다는 글이었다.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이다.

생각하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도 회사에서 점심 송년회를 한다고 했을 때 '그래도'라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내가 처음 경험한 이번 회사의 송년회는 아주 멋지고 근사한, 나로선 매우 만족한 송년회였다고 생각한다.     
지나간 한 해를 나누며 새해를 계획하는 일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장소가 어디든 메뉴가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꼭 고가의 만찬일 필요도 거창할 이유도 없다. 연말을 보내는 송년회가 딱히 정해진 것이 없으니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면 될 일이다.

더구나 요즘은 송년회 방식이 많이 다양해졌다. 봉사로, 기부로, 저마다 자신들만의 의미를 담는 일이 많아진 것인데 가족들도 외식보다는 집에서 송년회를 한다고 한다. 나도 집에서 오마카세 흉내를 내는 동생의 애교를 가족들과 함께 즐겼다.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한 해다.   

송년회 하면 시끌 벅적 떼창구호 술 먹고 소리 지르는 모습들이 먼저 떠올랐는데 이젠 그런 풍경이 아닌 신박한 점심 송년회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오늘 약속된 개인 모임 송년회도 점심이다. 대세는 점심이지만 내년엔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송년회 계획을 미리 생각해본다.

태그:#송년회점심,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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