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경남 사천군 서금동 일원 노산공원 표지판
 경남 사천군 서금동 일원 노산공원 표지판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다시 만날 그날까지 19] 어떻게 이런 곳에서... 아름다운 질매섬의 숨은 그림자(https://omn.kr/26xn0)에서 이어집니다.


노산공원을 향하여

질매섬 뒤로 하고 차는 삼천포 노산공원을 향했다. 노산공원 가는 차 안에서 또 대화는 계속됐다.

"내가 삼천포 살지만, 노산공원은 절대 안 가요. 내가 그곳을 우찌가겠노! 눈물이 나고 그 당시를 생각하면 공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아, 예. 그러시겠네요."

사실 어르신은 배를 빌려서 필자와 함께 질매섬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어르신이 지팡이도 짚고 연로하셔서 질매섬 위치만 확인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어르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몇십 분 동안 노산공원으로 가면서 "어르신, 제가 전화를 드렸을 때 끊으셔서 제가 입장이 곤란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했더니 어르신이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난 또 그런 김 선생 사정을 모르고 그랬으니 미안하오. 다음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드릴 테니" 하시면서 웃으신다. "이러고 다니면 여비는 우찌 충당하는고?"라고 물으시기에 필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냥 제가 사비로 다닙니다"라고 했다. "아구! 참 고생이 많으시오"라고 하신다.

"질매섬에서 형을 찾지 못하고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 가지고 결국 형을 찾지 못하고 팔포항으로 돌아와서 노산공원 앞에서 어머니가 통곡하고 계시니까 그 동네 할매가 왜 이렇게 슬피 우냐고 물었대요. 사실대로 이야기하니까 며칠 전에 새벽 3시경 노산공원에서 콩볶는 소리(총소리)가 타타타탕 다다다탕 났다고 전해주었어요. 다음 날 노산공원으로 찾아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좌) 노산공원 북쪽 입구와 (우) 동서쪽 입구 모습
 (좌) 노산공원 북쪽 입구와 (우) 동서쪽 입구 모습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이연조(맏형) 시신 찾은 곳으로 무거운 발길
 

주차를 시키고 어르신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노산공원 북쪽방향에서 올라가는 길이 옛길이다. 지금은 산책로와 다양한 나무로 심어졌지만, 옛길 그대로다. 당시 노산공원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40~50명으로 추정한다. 그때부터 어르신은 다리가 아파서 계단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필자는 어르신 팔을 부추기고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조심 올라갔다. 사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사고 나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봉환 유족 형님(이연조) 학살 당시 시신 수습 장소(나무 한 그루)
 이봉환 유족 형님(이연조) 학살 당시 시신 수습 장소(나무 한 그루)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어르신의 마음이 급해진다. 계단 올라서는 순간 어르신이 먼저 가시고 필자는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가시던 중 줄기가 6개로 뻗어 올라간 나무 한 그루 앞에 멈추신다. 지팡이로 나무 가리키면서 "이곳이 형의 시신을 찾은 곳이요"하신다. "아, 정말입니까? 이곳이라고요?" 산책로가 비슷비슷해서 어디인지 구분하기가 싶지 않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기억하신다.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어르신은 형의 시신을 찾은 장소 옆에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 가시더니 "아구! 다리가 아파서" 하면서 의자에 덜컥 걸쳐 앉으신다. 어르신은 상념에 잠기시는 모습으로 보인다. 곧이어 남쪽해안가 산책로를 가리키면서 "저쪽까지 가보시오. 해안가에서 올라오는 길까지 전쟁 방어기지로 구덩이를 파놓았어요" 하신다. "예, 잠시 기다리세요" 하곤 해안가 산책길을 따라 쭉 따라갔다. 옛날엔 여기에 충혼탑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 형을 어떻게 찾았습니까?
 

- 어르신 형을 어떻게 찾았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당시 며칠 전에 시신을 찾아간 사람들도 있다고 소문이 났어요. 노산공원 입구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지금의 산책로는 한국전쟁 때 방어막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파고 총구멍을 만들어놓았어요. 그곳 구덩이에다 집어넣고 학살했어요."

형은요. 울대뼈에 총을 맞았고 다른 신체 부위는 아주 깨끗했어요. 어머니는 삼베와 당신 머리카락으로 짠 허리끈을 보고 형을 알아보았고, 이봉환 어르신은 형의 금니로 시신을 확인하고 수습하여 모충공원에 묘 만들었어요. 함께 찾은 시신은 6구 정도 됐어요. 형의 시신을 보시고 어머니는 기절하셨어요. 그날이 음력(6월 17일)형의 제삿날이요."

- 그 후 어머니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어머니는 큰아들의 죽음으로 생긴 상흔 때문에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넘기시고 98세까지 장수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산책로 갓길 아래 낙엽 쌓인 곳이 학살지. 길게 구덩이로 팜.
 산책로 갓길 아래 낙엽 쌓인 곳이 학살지. 길게 구덩이로 팜.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 노산공원에 충혼탑을 옮긴 이유가 있습니까?

"보도연맹학살지와 충혼탑은 서로 상충되니 장소를 옮겼어요."

- 혹시 이곳에 '보도연맹학살지 안내 표지판' 세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지 않을까요?"

유족들의 대부분 생각이 옛정서와 유교적인 관점에서의 사고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많다. 시민들이 혹시 혐오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인식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그동안 국가가 은폐해 '연좌제'를 일삼았기에 유족들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살은 세월이니 그럴 만도 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노산공원을 뒤로 하고 돌아서 어르신과 간단한 식사를 하러 갔다.

따뜻한 인삼차 한잔으로

어르신이 안내한 중화요리 전문점은 삼천포에서 어르신이 잘 아시는 곳인 듯했다. 주인장과 인사도 나누시고 만두 서비스도 주신다. 짜장면과 소주 한 병을 주문하신다. 식사 중 술 한 병을 후딱 드셨다.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대화 중에 "이제 나도 늙어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하신다.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 댁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 집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가시오" 하신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단호하셨다. 실례를 무렵 쓰고 잠시 들어가니 아내와 따님이 함께 살고 계신다. 아끼는 인삼차를 내어놓으신다. 간단히 마시고는 인사를 하고 댁을 나섰다.

용현면 석계리 온정마을 매장지는

온정마을 석계리는 유족이 연로하셔서 필자와 동행해 주실 분이 없어 답사를 못했다. 그곳은 사천 정동면 보도연맹원들이 40~50명을 트럭에 싣고 삼천포 바닷가에 수장시키기 위해 가던 중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트럭이 고장 나버렸다. 그래서 삼천포 바닷가까지 못 가고 온정마을 입구에서 학살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시신은 한 달쯤(8월 25일경) 후 인민군 점령기(이하 인공시)였기에 시신 수습이 가능했다. 어느 지역이나 인공시기는 학살지에 인부를 동원시켜 시신을 수습하는 데 독려해준 것이 인민군이었다.

잔혹하고 사악한 가해자들
 

어르신은 잔혹하게 형을 죽인 주모자를 알고 계신다. 삼천포경찰서장 ㄱ은 남해 이동 사람이었고 동부경찰서 순사 ㄴ은 총잡이였다. 그리고 ㄱ은 형을 고소한 사람이다. 훗날 이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만나질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영도다리에서 저만치 걸어오는 한 사람을 유심히 보니까 ㄱ이었다고 한다. 순간 상대도 이봉환 어르신을 먼저 보고 눈치를 챈 듯 쫓아갔지만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잡지 못했다. 지금도 잡히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고 하신다. 어르신의 상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맺은 말
 

사천지역 매장지를 다니면서 느낀 점은 시신을 거의 수습해 갔다는 것이다. 가까운 진주에서는 보복이 무섭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인민군이 입성하기 전에 학살했기에 수습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천지역은 인민군이 입성해 경찰서와 지서 문을 열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깐 경찰서 근무자들이 명단을 공개하면서 질매섬은 몇 명 명단이 공개됐고 노산공원도 누가 학살됐는지 명단이 공개됐다. 그랬기에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을 시민에게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신다. 하지만 진실된 역사를 드러내어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유족들의 생각이 안타깝다. 또한 사천 유족분들이 거의 80세 중반을 넘어 노령이라 활동하시는데도 한계와 어려움에 봉착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천시는 청산되지 않은 사천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조사해 잘못된 역사, 즉 국가의 폭력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장소에 표지판을 세우는 것이 책무이다. 하루빨리 노산공원에 학살지 표지판이 세워지길 기대해 본다.

(* 21화 밀양편이 계속됩니다.)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김영희 (전)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태그:#노산공원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