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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현황을 바라보는 전미경 모습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현황을 바라보는 전미경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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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그날까지 17] 아버지가 '살인자'라 적힌 판결문... 딸은 하염없이 울었다(https://omn.kr/26v8i)에서 이어집니다.

기적이 일어나다

"여보세요. 회장님, 별일 없으세요?"

"아이고! 선생님, 제가 대상포진에 걸렸시유. 넘 스트레스를 받았나봐유!"

"아휴, 일도 중요하지만 제발 건강이 먼저이니 편히 좀 쉬셔야지요."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 라권집(피해자)의 딸(라도정)을 어떻게 찾았어요?

"아버지가 살았던 동네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를 찾아가서 참고인이 될 만한 분을 백방으로 찾아다니기 시작했시유. 낮에는 미용실 일하고 밤에는 쇠고기국밥을 끓어서 증언자와 참고인에게 드리면서 참고인 좀 해달라고 사정하고 또 부탁하면서 찾아다녔시유. 그중 참고인 5명을 세웠지만, 신빙성이 없다고 하여 또 다른 증언자를 찾아 헤매던 중 유연히 우익인사(라권집)의 딸(라도정)이 부여로 시집와서 산다는 소식을 듣게됐시유. 수소문하여 라도정의 집을 알아내었지만,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시유. 만약에 아버지가 정말로 라권집을 살해했다면 딸인 라도정(할머니)을 뵐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대문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또 돌아왔시유.

세 번째는 용기를 내어 이판사판으로 집으로 들어갔시유. 라도정은 하반신을 못 쓰고 있었시유. 제가 들어가니 누구냐고 묻더군유. '선동리 동네 사람이여유' 했지유! 선동리가 나도정 고향이었시유. '할머니 저 전재흥 딸이여유' 하니까 '아이고 전재흥 딸이 하나 있었다는 야거는 들었는디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는디 니가 바로 딸 미경이여? 어쩐 일이여?' 하더라고요. 예, 대답하고 판결문을 보여드렸더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우리 아버지(라권집)는 1.4 후퇴 전 인민군이 서천등기소 옆 창고에 우익인사들을 감금하고 1950년 7월 27일 불질려서 민간인 250여 명이 타 죽었어. 그때 아버지도 불에 타 죽었고 시신은 금이빨을 보고 찾아서 절대 너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인게 아니야' 하셨어유.

아이고 살았구나! 구사일생 우리 아버지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유. 라도정께 증언해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진화위 조사관을 집으로 방문케 하여 참고인 증언을 했시유. 진화위 결정문을 받고 난 이후 3년여 간 소고기국밥 끓여서 반찬과 김치 등을 갔다드렸어유."

- 회장님의 혼신과 일념이 이루어 낸 결실 같아요. 기적으로 일어난 것 같아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아버지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 일념이 기적이 된 것 같아유."

진실위에 이의신청 후 '진실규명 결정문' 발표날(2010년 12월 14일)

- 진화위 결정문 발표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진화위 1기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2010년 12월 27일 폐지되지유. 저는유, 자료와 증언을 확보하니 만감이 교차했시유. 감정을 수습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진화위에 제출했시유. 진화위가 이의신청을 받아들였고, 2010년 12월 14일 저녁 7시 마지막 회의가 아버지 진실규명 결정문이 확정되는 날이었시유.

저는 아침부터 진화위 복도에 자리 깔고 바닥에서 기다렸시유. 아버지 결정문 회의는 저녁 7시에 시작됐시유. 회의 시작 후 30분쯤 지나니까,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문을 박차고 나왔시유. 회의는 순조롭게 처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쥬.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5분 발언 신청했시유. 발언에서 그동안 상흔과 인고의 삶 그리고 진실규명을 위해 보낸 사연과 세월을 조목조목 설명했시유. 갑자기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어유. '제발, 전재흥 사건번호 2426이다. 60년간 여기까지 왔다. 자료 한번만 검토해 주시라'고 애원했시유."
 
전재흥은 살인자가 아니다


"당시 위원장인 이영조(진화위 위원장)도 천정을 쳐다보면서 눈시울을 적시고 회의에 참석한 국회의원들도 모두 울었시유. 사실 한국전쟁민간인학살 자료는 회의실 뒤쪽에 태산같이 쌓아 제쳐놓고 검토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상태였어유. 즉 1기 진화위 곧 폐지될 것이니 자동으로 폐지 시킬 계획이었던 것이지유. 이영조는 직원을 시켜 전재흥 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검토 후 전원 투표에 들어간다고 하대유. 다시 복도에 나와서 30분쯤 지났을까, 한국일보 기자가 '전미경씨 아버지 진실규명 받았어요. 축하드립니다.'라고 소리치며 알려주었시유. 결정 요지는 '군법회의 재판이 불법적'이라는 점과 '전재흥은 라권집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시유."
 
진실화해위원회 수정 결정문(왼쪽)과 무죄로 결정난 재심 판결문
 진실화해위원회 수정 결정문(왼쪽)과 무죄로 결정난 재심 판결문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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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 재심 신청

또 통화는 계속된다.

- 회장님, 재심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진화위 수정 결정문을 우여곡절 끝에 받아서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아버지 본적)재심 신청했어유. 재심거리 되나 안 되나 심의 결정 날 때까지 6개월 이상 걸리는 동안 피 말리는 나날이었시유. 잠 못 이룬 밤이 수도 없이 많았고유. 드디어 변호사(이영춘)로부터 심의 결정이 났다고 연락이 왔시유. 이제 겨우 절반 고비는 넘겼다면서 재판 날짜를 알려줘 재판이 시작됐시유.

재판 결정 내리는 날 2013년 1월 31일 단심에서 무죄로 판결 났시유. 검사가 무죄로 항소를 안 했기 때문지유. 무죄 판결을 하면서 판사가 하고픈 말 있으면 하시라고 발언권을 주었시유. 10여 분간 칠십 평생 상흔의 흔적과 인고의 세월을 조목조목 말하니까 법정은 순간 정적이 흐르고 슬픔에 잠겼시유. 다들 눈시울을 붉혔지유.

저는유, 그동안의 원한이 눈물로 대신하듯 흘러내렸시유. 판사는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저 유족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함께 마음 아파했시유. 변호사는 저에게 무죄판결 받고 2주간만 기뻐하라고 하대유. 왜유? 하니까 항소기간이 2주이기 때문이래유. 그런데 2주가 지났는데 검사 측에서 항소하지 않았시유. 관례로 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무죄 판결받은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하대유. 변호사도 그랬고 주변의 법조계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판결이었대유 글쎄."

한숨을 내쉬시며 웃으신다. 필자도 오랜만에 진실로 기쁜 웃음을 지었다.

- 참 이런 기막힌 사연이 천하에 어디 있대요.

"항소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래유. 라권집은 서천등기소 화재로 죽었고 시신도 금니 보고 찾아서 장례도 마쳤고 라도정(딸)이 아버지가 전재흥에게 살해되지 않았다고 하고... 이런 명백한 사실이 증명됐으니 말입니다. 아버지의 무죄 판결문을 받고 나서 정신이 혼미해졌어유. 아버지 살인자 누명을 벗긴 것만 해도 황송했어유. 저는 일생을, 20여 년 넘게 아버지의 사건에 매달려 살다가 가는 거여유!"

지금도 연좌제로 올가미 엮이다

- 회장님 안녕하세요. 지금도 연좌제가 있다고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깨 무죄 판결받고 3년이 지나 불현듯 '부당이익금 환수' 통지를 받시유. 즉, 한국전쟁민간인학살배상(민사)소송배상금이 (2017년~2021년 11월 25일) 부당이익금임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통지였어요."

결국 7년가량 법정투쟁 시작
 

"민사소송으로 배상받고 난 후 형사소송이 시작됐는데 민사에서 받은 배상금 일부가 부당이익금이라는 것이에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유! 민사소송은 죄없이 학살된 자로서 배상으로 받았고 형사소송은 살인자로 누명을 씌워서 무죄로 판결받고 받은 것인데 무슨 부당이익금을 환수하란 말인가유?

결국 소송은 시작됐고 1차 판결은 패소해 다시 항소했고, 7년 동안 주택을 가압류당하면서 고난의 투쟁은 또 계속됐시유. 2차 판결에서 승소하니 육군본부, 검찰청이 항소하대유. 저는유, 한번 결심하면 하는 사람이여유. 만약 내가 대법원 3차 판결에서 패소하면 내 억울함을 원고에 써서 전국으로 뿌릴 것이고, AP통신에다 '70년의 올가미'를 알릴 것이며, 대법원에서 목 매달아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시유. 저는유, 그때 상황은 폭풍전야에 조각배보다 못한 신세에 이르게 됐시유."

내 소원은 따뜻한 된장찌개 한 그릇

" 뜻밖에도 3차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했어유. '내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 다 내어놓을 테니 우리 아버지 20대로 돌려놔라. 우리 어머니 인생 어디 갔고 우리 가족들 인생 어디 갔냐. 그리고 전미경의 삶을 돌려놓아라'라고 했어유. 내 소원은유, 우리 아버지 청춘을 돌려놓으면 따뜻한 된장찌개 한 그릇 끓어서 잡수시게 하는 것이어유."

또 한없이 눈물을 흘리신다.

"결국 민사소송, 형사소송 모두 20여 년 가까이 투쟁 끝에 승소했시유."

"회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필자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은 대전 골령골 행사와 사업에 혼신을

지금은 골령골 발굴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MBC 다큐 '나는, 나는 상중이오' 다큐멘터리 촬영을 비롯해 여러 언론매체에서 인터뷰를 계속한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육촌 조카가 암투병하고 있는데 전미경(고모)에게 전화해 '고모의 고난과 인고를 보고 나도 암을 이겨보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했단다. 
 
칠십년의 올가미

돌아보니 세상에 온지가 길고도 멀 더이다.
살인자 누명 씌워
스물 다섯 살 아비 목숨 빼앗아
골령골에 척살하고

생후 24개월 된 어린 것 목에 씌워 놓은
연좌죄 올가미
강산을 돌고 돌아 일곱 바퀴
62년만에 무죄 판결

끝인가 했더니 자택 압류가 왠 말인가
아버님 억울한 죽음 가슴에 안고
한 평생 피 눈물로 살아온
인고의 세월을 그대들은 아는가

사형 보상금 삼천칠백삼만칠천사백원
살인 누명쓰고 육십이년, 자택 가압류 칠년
저승길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 끝을 보았으며

민사보상 형사보상 차마 억장이 무너져
고이 간직해 보관했으니
스물다섯 동안의 우리 아버지
내 앞에 모셔주면 내 모든 것 모두 주고

아버님 손 부여잡고 아버님 등 기대며
노숙자로 살면서
따뜻한 된장찌개 앞에 놓고
아버님 식사하세요
한마디 드리고 싶소

2021년 6월 22일 새벽 2시 자택에서
전미경 
 
막내 삼촌의 슬픈 사연

전미경은 삼촌이 두 명 있었다. 둘째 삼촌(전재원)은 월북하고 막내 삼촌(전재환)은 전미경보다 다섯 살 위였다. 막내 삼촌은 어릴 때 함께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고기반찬 있으면 미경이만 챙기시니깐 미경에게 살짝 와 '너 고기 다 먹지 말고 남겨서 나 줘야 한다'라고 말한 기억이 새록새록 날 정도로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후 전미경만 빼고는 모든 사람을 큰아들(아버지) 죽인 우익 사람으로 보여 사람들을 만나면 도끼, 삽, 낫 등 닥치는 대로 들고 죽인다고 하셨는데 불행하게도 막내 삼촌마저 우익 사람으로 보여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할 수 없어서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하고 생활했다. 그러던 중 막내 삼촌이 월남전에 참전한 사이 전씨 집안의 불행한 역사는 시작된다.

전미경이 14살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고모는 전답과 본가를 모두 처분하고 전미경을 12살 많은 사람과 강제로 결혼시킨다. 그나마 의지하고 생활할 수 있었던 막내 삼촌은 월남전을 마치고 돌아와 고모를 만나서 고모의 이야기만 듣고 전부 전미경의 잘못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렇게 쓰라린 세월을 보내는데 막내 삼촌은 강릉에서 결혼하고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막내 삼촌은 전미경의 오해가 진실로 드러나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후 삼촌은 46세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모든 장례식을 전미경이 도맡아 하고 조부모 곁에 모셨다고 한다. 그 후 지금까지 막내 삼촌 제사도 전미경이 모시고 있다.

조부모님의 심정

한국전쟁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 중 한 여인의 인생을 감히 소량의 분량으로 마치니 전미경 회장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필자의 20쪽 남짓의 지필 내용은 '빙산의 일각인 듯'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전미경의 비통한 사연에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들 셋을 전부 잃어버린 조부모님의 심정을 노래한 시 한 편을 끝으로 전미경의 사연을 마무리할까 한다.
 
조부모님

생전에 답답한 가슴 저승길에 털어 버리소서
천금 갖은 두 아들 전쟁에 빼앗기고

자식 잃어 아픈 가슴 표현도 못 한 채
죄인처럼 살다 가신 조부모님

생의 끝자락 기억의 끈 놓쳐 버려
앞에 간 두 아들 이름만 부르시다.
막내아들 옆에 기고 누우신 그 자리

살인자 누명 쓰고 육십 이년
오늘에야 밝혀진 진실 그리고 결정문
조부모님 영전에 바치옵니다.

억울해 눈 못 감고 가셔야만 했던 저승길
모든 원한 다 버리시고
쌓이고 쌓인 그리움 저 바다에 흘려보내시어
눈물 없는 밤 되소서

2010년 12월 15일 조부모님 산소에서
(아버지 진실규명 된 날이 2010년 12월 14일)

전미경 

전미경 시집의 애환
 

전미경의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는 개인의 삶 외에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고모 등에 이르는 가족사이자, 나아가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의 유족을 대변하고 위로한다. 역사가 개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를 신랄하고 정제된 시어로 고발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꾸짖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되묻고 있다.

*19화 경남 사천편이 계속됩니다.
 
필자가 진주 봉강리에서 발굴하는 모습
 필자가 진주 봉강리에서 발굴하는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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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영희(전 교사) /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태그:#대전골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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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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