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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사후 150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극단으로 평가되는 인물이 있다. 고려말 승려 신돈(辛旽, ?~1371)은 경상도 영산 옥천사의 여종에게서 태어났다. 따라서 아버지나 출생 연도가 알려지지 않는다. 승명은 편조(遍照)이다.

세상에서 '희대의 요승' 또는 '당대의 개혁주의자'로 불리는 신돈은 공민왕이 사부(師傅)로 삼고 진평후(眞平候)에 봉하면서 개혁을 이끌었다. 신돈이 공민왕을 처음 만난 것은 1358년 왕의 근신인 김원명의 소개였다. 언변이 좋았고 국정개혁의 방략이 새로워서 공민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 우뚝 홀로 서 있는 사람을 얻어 인습으로 굳어진 폐단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던 즈음 신돈을 보고 나서 그는 도를 얻어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한 출신인데다가 일가친척이 없으므로 일을 맡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안정복, <동사강목>)

공민왕은 즉위한 초기 승려 보우(普愚)를 궁중으로 불러 정사를 자문받았다. 보우는 원나라 불법을 익힌 뒤 중국의 남쪽 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돌아와 임금의 신뢰를 받으면서 선종과 교종의 사찰을 통괄하는 주지 임명권을 받아 불교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가 떠난 후 신돈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1365년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죽으면서 공민왕은 정사보다 왕비 추모사업에 열중하고 7일마다 불사를 열어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국사는 신돈이 도맡아 집행하였다. 하급관리들이 신돈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의 행동은 신속했고 인사개편도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편조는 집권한 지 석 달 만에 공민왕이 늘 불안하게 느끼던 대신들을 거의 파면 축출하고 죄수와 문벌의 파벌도 없애버렸으며 무장을 대표하는 최영마저 조정에서 쫓아버렸다. 편조는 김부식보다 긴 51자 직함을 받았는데, 대략 "공신으로서 행정의 총책임을 받고 관리의 비리를 적발하는 감찰 업무와 승려에게 관련된 일과 천문과 기상과 복서를 보는 책임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이즈음 공민왕의 배려로 이름을 신돈으로 바꾸었다. 그는 사저를 갖지 않고 남의 집에 기거하며 조정에 나올 때에는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사람들이 비승비속(非僧非俗) 이라 불렀다.(이이화,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당시 고려는 북쪽에서는 홍건적,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범으로 바람 잘 날이 드물었다. 여기에 오랫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생겨난 친원파 대신들이 포진하여 공민왕의 개혁을 가로막았다. 공민왕은 천도를 구상했다. 개경을 떠나 새 도읍지를 만들고 새 인물들로 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인종 때 묘청·백수한 등의 서경천도설을 떠올렸다.

공민왕 16년(1367) 4월. 왕은 신돈에게 명을 내려 서경에 가서 도읍 터가 될 만한 곳을 직접 살펴보게 했다. 신돈은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어 스스로 지세를 판단했다. 물론 몇 몇 고위 관리와 실무에 능한 하급 관리도 대동했다. <고려사>를 보면 재상 이춘부와 김달상, 판서 환관 윤충좌, 전교령 임박, 내서사인 김린, 지게교 김희 등이 함께 서경으로 갔다하니, 개경의 고관들마저 나서 천도 후보지를 물색한 만큼 큰 행사였다. 그러나 신돈은 진심으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품은 것 같지는 않다.(백승준, <신돈과 천도론>,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

권력(자) 주변에는 언제나 날파리가 몰려든다. 또 개혁정치에는 기득권 수구세력의 훼방이 따른다. 신돈을 차츰 초심을 잃고 권력 맞에 빠져들었다. "신돈은 왕을 대신하여 관료들의 조하(朝賀)를 받았고, 궁궐 출입 때의 행렬이 왕을 방불케 했다. 1366년에 전민변 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개혁의 선두에 서서 권세가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농민은 "성인이 나왔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에게 아부하려는 자들의 뇌물이 횡행하는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공민왕은 사람을 잘 시의(猜疑)하는 성질이 있어 비록 심복대신이라도 그의 권세가 강성하게 되면 반드시 시의하여 베이는 일이 많았다. 동왕 20년에 이르러 신돈도 그의 위세가 높고 또 그의 발호가 너무나 심한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지라 왕이 그를 꺼려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도담사 비밀히 불궤(不軌)를 꾀하다가 그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기현·최사원 등 신돈의 당류(黨類)를 베는 한편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 보냈다가 뒤이어 참살하고 다시 그의 일당인 대호군 이백수, 호군 백순·손연·김두달·김원만, 승천정 철관, 이춘부·김관·신돈 등을 베고 그의 2세 아이와 판사 강성은(신돈의 이복동생)을 죽이는 등 많은 그의 당류를 장류(杖流)에 처하고 또는 노비로 삼았다.(김상기, <신편 고려시대사>)

신돈은 비록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그 열망은 조선 왕조를 여는 급진 개혁세력의 등장을 예고했고, 결국 조선의 전제개혁으로 그 꿈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기득권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회의 영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창의적인 분위기를 이끌었던 다양성의 요소들은 조선사회에서 획일화되고 편협한 사상적 문화적 풍토로 굳어졌다.

조선왕조의 개창자들은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던 토지문서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일주일 동안 타올랐다. 불길 위로 솟구쳐 오르는 연기 속에는 못다 이룬 신돈의 꿈이 실려 있었다.(김현식, <신돈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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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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