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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퇴직한 뒤 코이카 해외봉사단으로 일하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퇴직 후 해외에서 살아보기, 이렇게 이뤘습니다 https://omn.kr/25ecz).

크리스마스 시즌에서 연말연시로 이어지는 이곳 필리핀도 축제 분위기로 사뭇 들떠 있습니다. 각급기관과 상가, 가정집에서는 2~3개월 전부터 크리스마스트리와 형형색색의 전등으로 장식을 해놓고 여기저기 캐럴이 울려 퍼집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 풍요롭진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따스한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는 모양입니다.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의 온정이 어릴 적 교회에서 나눠주던 선물 보따리의 추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열대의 크리스마스라 좀 생경하긴 합니다. 내겐 크리스마스 시즌 하면 으레 매서운 한파와 함께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이나 군고구마, 붕어빵의 따습고 고소한 기억이 먼발치에서 서성입니다. 하지만 여긴 여전히 30℃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날씨라 무척 덥습니다.

골목을 따라 집집마다 가꾸는 작은 정원과 줄지어 놓인 화분에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부겐베리아, 히비스커스, 플루메리아 등 이름도 생소한 꽃들이 일년내내 피고 집니다. 키 큰 야자수나 바나나도 열리는 시기가 따로 있을법한데, 제가 보기엔 언제나 주렁주렁 풍성합니다. 열대의 식물들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식물과는 다른 비장함을 내면에 숨기고 있기에 이렇게 화려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필리핀 특유의 크리스마스 풍습
 
집집마다 담장을 따라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줄지어 핍니다.
▲ 12월에도 활짝 핀 부겐베리아 집집마다 담장을 따라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줄지어 핍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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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국교가 천주교라고 하고,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가장 중요한 명절로 꼽힙니다. 필리핀 대통령실에서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 올해 화요일인 12월 26일을 임시 공휴일로 전격 지정 발표했을 정도입니다. 교회와 성당에서는 크리스마스 열흘 전부터 새벽과 저녁 시간에 미사를 진행합니다. 이때는 모두들 참석해 소원을 비는 것이 풍습처럼 생활화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깡통을 두드리며 오곡밥과 부럼을 얻으러 다니곤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이들이 저녁마다 떼를 지어 이웃집을 돌며 병뚜껑 같은 재활용품이나 깡통 혹은 악기를 들고 작은 공연을 합니다. 그러면 이웃들은 용돈이나 사탕 등을 챙겨 준답니다. 내가 사는 골목도 며칠째 아이들의 연주행렬로 소란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게 곧 삶의 활력이고 이웃들을 연결시켜 주는 풍속이겠지요.

한국 특유의 추석이나 설날 명절처럼 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온 일가친척이 고향에 모여 잔치를 벌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는 통돼지 바비큐인 레촌이나 비빙카 등 전통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합니다. 서로 선물과 용돈을 주고받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 중 하나입니다.

제가 소속되어 있는 학교에서도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합니다. 지난주 초에는 다바오주 TESDA(기술교육 및 기술개발기관) 각 기관이 모여 1박 2일 동안 연말 평가회를 실시했습니다. 또 지난주 금요일에는 우리 학교 자체적으로 연말 실적평가회를 했습니다. 학과별로 한 해 동안의 실적을 프레젠테이션하고, 사전에 투표로 뽑은 우수 직원에 대한 시상도 했습니다. 딱딱한 평가회가 아니라 중간중간에 오락과 게임을 가미하여 모든 직원이 동참하는 행사가 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직원 상호 간에 선물을 교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본인이 받고 싶은 선물을 미리 적어 내고, 본인이 선물을 줄 사람을 제비뽑기로 선정해 500페소 범위 내에서 미리 선물을 준비했다가 교환하는 행사입니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이런 선물은 크리스마스를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할 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평가회들이 가치 있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티없이 맑은 아이들
 
학교에서 연말 평가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학교에서 연말 평가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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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성탄절에는 동료 단원들과 함께 내가 사는 마을 티분코(Tibungco)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거리의 턱복(Tugbok)마을에 있는 고아원을 찾아갔습니다. 선물로는 학교 카페테리아 제빵사의 손을 빌려 쿠키를 굽고, 새해 달력도 손수 만들었습니다. 동료 단원은 국내에서 젊은 시절에 극단을 꾸려 왕성하게 연기 활동을 하며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던 베테랑 연기자입니다. 지금은 봉사활동에 헌신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소외된 이웃들에게 공연을 선사합니다.

고아원은 그리스도 사랑의 선교 수녀회(SMAC, Sorelle Missionarie dell'Amore di Cristo, Inc.)에서 1998년에 버려지고 방치된 고아를 돕기 위해 설립한 비정부 아동기관입니다. 간선도로에서 좀 떨어져 숲속에 자리한 건물은 원생들이 생활하기에 아주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현재는 3세부터 18세까지의 다양한 연령대의 원생 3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답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금세 모여들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이들은 한 가족 같았습니다.

얼굴 어디에서도 어두운 구석은 찾아볼 수 없고, 명랑하고 밝게 웃는 표정이 마치 숲속에서 싱그러운 꿈을 먹고 자라는 어린 천사들 같았습니다. 수녀님들의 사랑이 아이들 마음 깊숙이 스며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동료 단원은 삐에로 분장을 했습니다. 삐에로 복장으로 2시간 가까이 풍선을 이용해 아이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마임 공연을 하는 동료 단원의 모습이 참으로 진지하고 열성적이어서 연기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함께 웃으며 즐거워하던 아이들도 저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이 옷을 입고 이런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 동료가 대단합니다. 그만큼 연기 자체를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원생들 앞에서 삐에로 공연을 하는 최경식 코이카 봉사단원
 원생들 앞에서 삐에로 공연을 하는 최경식 코이카 봉사단원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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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준비해 간 쿠키와 음료수를 나눠 먹으며 2023년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고 보람되게 보냈습니다. 지구촌 어디나 따뜻한 온정은 필요하기에, 우리의 이런 작은 나눔이 소외된 이웃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태그:#코이카봉사단, #한필직업훈련센터, #TESDA, #필리핀다바오, #SM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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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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