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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리셰 중에는 속칭 데드 플래그(혹은 사망 플래그)라고 부르는 용어가 있다. 전쟁 영화에서 전투를 앞두고 가족사진을 꺼내는 인물은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또 괴물 영화에서 혼자만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인물은 괴물에게 가장 먼저 잡힌다. 이런 방식의 연출은 이제 관객들도 너무나 쉽게 눈치채는 서사적 장치다.

이 데드 플래그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원리에는 역설이 담겨 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명시적으로 드러난 인물이 죽거나 너무나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 죽을 때 그 애처로운 비극성은 더 효과적이다.

실제로 역설은 비극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비극에 있어 운명이란 인물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종착지인데, 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그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 때문에 오히려 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이 의도한 행위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바가 이뤄지는 것이다.

역설을 떠받치는 이분법적인 구조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극 속에서만 나오는 일일까. 사실 역설이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결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혼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결혼에 대한 고정 관념은 배우자의 조건을 정해놓게 되고, 혹시나 생길 연애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주기 마련이다. 결혼식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혼수는 어느 정도여야 하고, 신혼집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 등 그런 생각들은 되려 결혼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그렇게 결혼이란 것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은 반려자보다 결혼이라는 자신의 관념 자체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소설가 김이설의 <빈집>이란 작품 속 수정이란 인물은 카탈로그 속 이상적인 모습처럼 신혼집을 꾸미고 오히려 이 모습을 꾸준히 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은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게 된다. 수정이 꿈꾼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상품의 배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현실의 역설도 서사적 역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진실은 비극에서 주인공이 가진 결함처럼, 우리 사회가 가진 결함이 역설의 작동 원리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젠더 갈등 또한 그렇다. 양 성별에 대한 비하적 표현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토대로 이뤄졌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상당히 집착적이다. 혐오 표현이 담긴 게시물을 올리고, 각종 기사에 비슷한 내용의 댓글을 다는 모습들을 보면 상당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몇몇 유튜버들이나 정치인들이야 이 관심을 토대로 이익을 얻는다지만, 그걸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다수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그 혐오 표현들은 서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의 산물이다. 그들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서로에게 관심이 병적으로 깊은 것이다.

이 현상의 이면에는 연애-과잉 담론이 있다. 이미 수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연애 서사가 넘쳐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의사가 나오든 군인이 나오든 심지어 북한으로 넘어가든 결론은 연애다. 심지어 도깨비나 외계인이어도 연애로 흘러가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에서도 연애 콘텐츠는 흥행 보증 수표처럼 여겨진다. <나는 솔로>, <솔로 지옥>, <환승 연애> 같은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으면 연애 집착증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나는 솔로>와 같은 프로그램은 마치 사회 실험을 보는 것 같다. 반드시 연애해야만 하는 상황에 남녀를 몰아넣고, 경쟁시키고 사회적 웃음거리를 만드는 모습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를 현실화시킨 모습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탁월하다. 영화 속에서는 연애에 실패하면 동물로 변하는 호텔이 있고, 그 호텔 밖을 벗어나면 연애하는 사람을 죽이는 숲이 있다. 이 자체로 이미 한국 그 자체가 아닌가.
 
<나는 솔로>
 <나는 솔로>
ⓒ ENA, SBS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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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각종 혐오 표현들과 각종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연애 콘텐츠를 한눈에 놓고 보면 그 자체로 <더 랍스터> 속 역설과 닮아있다. 한쪽에서는 남녀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서로 연애 못해서 안달이 난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신작인 <괴물>에서는 아이의 학교폭력 문제를 두고 갈등하는 어머니와 학교 담임 선생이 등장한다. 학교의 무사안일주의적인 태도와 집단 따돌림 속에서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와 선생님인 호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사오리가 아들을 위해 하는 행동은 그 학교에서 유일하게 아이들을 위하는 교사였던 호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호리의 오해는 학교폭력을 무방비 상태로 자라나게 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일본의 사회적 시선, 문제를 감추기 위해 개인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키우는 진정한 괴물이었다.

이렇듯 역설은 이를 떠받치고 있는 이분법적인 구조 속에 있다. 문제를 단순화하고 해결책을 단순하게 만드는 구조 말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란 그 원인이 결코 단순할 수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여성, 남성, 외국인, 특정 지역 출신 등을 문제의 원인으로 삼는다.

유럽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의 역사가 되려 가자 지구에서 학살의 주동자가 되는 현재가 되듯, 단순한 이분법의 원리는 역설을 움직이고 있다(몇몇 시온주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역사적인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 <더 랍스터> 속 세계를 조금만 더 떨어진 채 생각해 보면, 연애를 강요하는 호텔과 솔로를 강요하는 숲은 서로 공범 관계 속에 있다. <괴물> 속 학교폭력과 교사들의 무사안일주의 사이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 운동가이자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장이었던 프레드 햄프턴은 흑인 차별을 막기 위해 싸웠지만,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 라틴계 이민자들과 연대했다. 그는 인종주의의 뿌리를 자본주의에서 찾았다. 피부색에 대한 혐오 속에 숨은 욕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총을 들고 싸우기보다는 책을 들고 가난한 사람을 보살폈고, 거리의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빠르고 감정적인 해결책보다 지지부진하지만, 더 확실한 해결책을 찾았다. 미래 세대를 향한 변화를 인종차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결책으로 삼았다. 이런 그의 생각은 실제로 백인 기득권자들에게 그 어떤 시도보다 실질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FBI는 실제로 그를 검은 구세주(블랙 메시아)라고 불렀다. 안타깝게도 프레드 햄프턴의 시도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자라난 혐오의 싹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자라고 있는 생각들은 어떨까. 실존하는 남녀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연공급 체계를 손보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이 문제를 건들면 고구마 뿌리처럼 다른 문제들이 따라 나오게 된다. 이것뿐일까. 지금 정부는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하자고 손쉽게 수능과 인기 스타 강사들을 문제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실은 이 문제는 교육 개혁, 대학 서열화, 의대 열풍, 의대 정원 확대, 소득 격차, 대기업 중심 산업 구조 개편 등등 서로 연결된 것들만 해도 다 골라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제일 쉬운 해결책은 약한 상대를 골라 욕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설의 짝은 비극이다.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은 결국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라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고, 결론이 정해져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오히려 섣불리 판단하고 벗어나려고만 하면 이 문제들은 운명처럼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 <그린 나이트>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지도 모른다. 아서왕의 조카이지만 한없이 어리석었던 가웨인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녹색 기사가 제안한 게임에 응하고 손쉽게 명예와 재물을 얻고자 했다. 다만 그 조건은 1년 후 자신이 녹색 기사에게 했던 것 그대로 목이 잘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지금 바로 모든 걸 얻을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렇게 1년을 흥청망청 놀았던 가웨인은 결국 반강제로 녹색 기사가 있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가웨인의 이 여정은 고난의 관문이었고, 이 과정이 되려 그를 진정한 기사로 만들어주게 된다.

이 영화가 평범한 이야기였다면, 이 여정이 그를 성장시켜 아서왕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면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탁월함은 다음부터 시작된다. 녹색 기사는 그의 목을 진짜 자르려고 한다. 가웨인은 녹색 기사에게 목이 잘리기 전, 자신이 돌아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환상들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아내, 사람들의 환호, 위대한 왕의 모습 등을 떠올린다. 그리고 기사로서 진정한 명예는 왕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찬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용기에서 오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쉽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자

결국 역설적으로 기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길이 진짜 기사의 길임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그는 기사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끊어내고 죽음을 받아들이며 진정한 기사가 된 것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가 오고 있다. 내년을 맞이하며 우리가 빌어야 할 소원은 찰나의 행복일까, 아니면 어렵고 험난한 길을 풀어가야 할 용기일까. 우리 시대를 새롭게 결정지을 순간이 있을 새해다. 다시 우리는 정치권에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영웅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길고 험난한 길을 함께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항상 쉽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자. 당장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것 같은 이들은 역설적으로 모든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사람이니 말이다.

태그:#역설, #연애, #혐오,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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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이 누군가에겐 낯설게 느껴졌으면 합니다. 익숙함은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낯설게 바라볼 때 비로소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디서나 이방인이 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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