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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흑산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중 해로(海路)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중국 사신들이 머무는 관사 터와 사신의 입경(入境)을 알리는 봉수대의 존재는 읍동마을이 한중 해로에서 핵심적인 거점 포구였음을 알려준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는 상나리 고개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상라산(높이 226m) 정상에 고대의 제사 유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오르내리는 전망대가 되었다. 2010년 발굴조사 때 지표와 암반층 사이에서 통일신라 시대 토기편과 철제마(鐵製馬) 7점, 토제마 1점을 비롯해 조질(粗質)청자류 흑유자기(黑釉磁器) 등 다량의 고려시대 자기편이 출토됐다. 제사를 지냈던 방향은 유물의 출토 지점으로 보아 북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철마 신앙은 위험한 항해 활동에 종사하는 뱃사람들이 안전을 기원하는 고대 해양 신앙. 전남 연안과 도서 지방의 제사 터에서도 철마가 많이 발견됐다. 상라산 제사 터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사용한 유적이다. 고려 말기부터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을 쓰면서 상라산 제사는 사라졌다.

당나라 향하는 길목에 있던 흑산
  
상라산 쪽에서 내려다본 상나리 고개 열두 굽이 길.
 상라산 쪽에서 내려다본 상나리 고개 열두 굽이 길.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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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터 유적에서 50m 아래로는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나오는 봉수대다. 중국 사신의 입국 또는 주변 섬들 사이에 긴급 상황을 알리는 기능을 했다. 봉수대 아래로는 읍동마을에서부터 꾸불꾸불 기어 올라오는 상나리고개 열두 굽이 길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읍동마을 뒷산에 조성된 산성은 상라산(上羅山)의 북쪽 능선에 있다. 지형적으로 건물지 양쪽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산성에서는 해로를 감시할 수 있다. 규모가 작고 우물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외적을 방비하는 기능보다는 바다를 조망하고 봉수대를 관리하는 임무가 주였을 것이다.

중국사신 관사 터는 상라산에서 뻗어내린 해발 약 7~9m의 지대에 자리한 구릉 끝에 있다. 일명 해내지골로 불렸다. 주춧돌, 적심(積心), 기단(基壇), 석열, 축대 등 유구(遺構)가 남아 있다. 전체 건물의 규모가 남북으로 26.4m 동서로 11.7m. 정면 초석간 거리는 4.4m. 자연석이나 막돌이 아닌 상면을 잘 다듬은 초석을 사용했고 100×90cm로 큰 편에 해당한다.

남송에서 고려를 오가던 중국 사신이 묵던 곳이다. 몇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평기와, 막새, 명문(銘文)기와, 자기, 도기, 중국 동전 등이 나왔다. 이 중 능성군와초제8대(陵城郡瓦草弟八隊)라는 명문은 이 건물의 기와를 제작한 곳을 가리킨다.

능성군은 현재 전남 화순 능주의 옛 명칭. 자기류는 청자가 주류이고 대접 접시 병 등이 출토됐다. 중국 남송대(1127~1279) 자기도 함께 출토됐다. 중국 자기와 더불어 발견된 중국 동전 가우통보(嘉祐通寶)와 희령원보(熙寜元寶)는 11세기인 송나라 인종 신종 연간에 주조된 것으로 건물의 운용 시기와 기능에 단서를 제공하는 유물이다. 
 
발굴조사를 마친 뒤에는 유구를 흙으로 덮어두어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다. 몇백 년 묵은 후박나무 한 그루가 중국사신 관사 터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다.
  
흑산도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물 지석묘
 흑산도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물 지석묘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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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흑산도 관사터와 봉수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1123년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 일행으로 고려에 와서 3개월 간 고려방문 일정과 체류 기간에 보고들은 정보를 글과 그림으로 세세히 서술했다.
 
흑산은 백산의 동남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험준하고, 바싹 다가가면 산세가 중복돼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있고 양쪽 사이로 바다가 들어가 있는데(灣入), 배를 감출 만하다. 옛적의 해정(海程)에서 사신선이 머무른 곳으로 관사(官舍)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에는 여기에 정박하지 않았다. 주민이 사는 취락이 있다. 나라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돼 온다. 중국 사신선이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매번 산마루에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서로 호응해 왕성(개경)에까지 이르는데, 이 일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고려도경 제35권, 해도(海道) 흑산조(黑山條)-

서긍은 명주(明州) 닝보(寧波)에서 출발해 흑산도 근처를 지나 서해를 따라 북상해 개경에 이르는 항로를 거쳤다. 해정(海程)이라는 옛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흑산도가 통일신라 시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관문 포구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도 흑산도 항로를 소개하면서,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 등이 이 항로를 오가는 상선에 편승해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합격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 사신이 들어오면 봉화를 밝히던 봉수대.
 중국 사신이 들어오면 봉화를 밝히던 봉수대.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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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천사섬에도 마을마다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당들이 있었는데 기독교의 영향으로 지금은 명맥이 끊긴 곳이 많다. 흑산도에는 신안군 향토사료로 지정된 진리당이 남아 있다. 진리당은 정월 초부터 3일간 열리는 용왕굿을 통해 뱃길의 무사 항해와 풍어를 빌던 곳이다. 진리당 우측으로는 숲길을 따라 150m 떨어진 해변에 바다의 신을 모시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다. 진리당의 하당(下堂)이다. 용왕당 주변에는 흑산도의 해안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당산 제사로 어선 무사고와 평화 빌던 어민들 

흑산도와 주변의 섬에는 모두 15개의 당산이 있다. 마을의 안녕과 어선의 무사고, 풍어(豐漁)를 비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흑산도 일대는 제당(祭堂) 신앙이 아직도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 먼바다의 풍랑이 밀어닥치고 바다에 삶을 의지하는 거친 환경에서 어민들은 당산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고 공동체의 화합을 추구했다.
  
흑산도 일대 당산의 최고당인 진리당.
 흑산도 일대 당산의 최고당인 진리당.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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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당은 흑산도 일원에 있는 당산들의 본당이다. 정월 초에 제사를 지낸다.

진리당 주변에는 제당을 감싸는 성황림이 우거져 있다. 그 안에 초령목(招靈木) 자생지가 있다. 초령목은 목련과 초령목속이며 아시아 1종 1속의 희귀종. 이 나뭇가지를 불전에 꽃아 귀신을 부른다는 의미로 '귀신 나무'라고 불렀다. 수령 300년의 초령목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았으나 1994년 고사했다. 대신 주변에는 어린 초령목 40여 그루가 자라고 있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대를 잇고 있다. 초령목 자생지 주변엔 산책로가 조성돼 신안군이 '신들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겨울에 꽃이 피는 동백나무까지 어우러져 사철 꽃이 피는 정원이다. 신우대와 소나무가 만든 터널이 성황당에서 철새박물관까지 이어진다. 터널 아래로는 딱딱한 바위나 나무껍질 위에 자라는 양치식물인 석위와 일엽초(一葉草)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석위는 줄기 하나에 모든 몸을 의지하고 산다. 가느다란 줄기는 철사처럼 강해 다른 식물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는다. 일엽초는 줄기가 옆으로 뻗으며 잎이 무더기로 난다. 
 
읍동마을 뒤편 속칭 탑산골 골짜기에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무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절 이름도 모르고 석탑과 석등만 서 있는 채로 방치됐다. 유물 지표조사 과정에서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이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돼 사찰의 명칭과 시대가 밝혀졌다. 문화재청과 신안군은 6차에 걸친 무심사지 발굴 조사를 마치는 대로 국가사적 승격 및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2009년 조사에서는 일산지유자영선원(日山指鍮自英禪院)이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됐다. 일산은 흑산도이고, 지유는 사찰 건축을 지휘하던 승려장인, 자영은 승려의 성명이다. 폐사된 절터에 절의 건축을 지휘한 승려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드문 사례. 선원은 선종 계통의 절을 말한다. 한문 8자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인 무심사의 삼층석탑과 석등. 팽나무는 수령 300년이
넘은 보호수다.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인 무심사의 삼층석탑과 석등. 팽나무는 수령 300년이 넘은 보호수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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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룡 목포대 교수는 논문에서 한반도 서남해 지역의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주도한 장보고(8세기말~841) 시대부터 흑산도의 읍동포구가 중요한 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읍동마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시대까지 번성했던 포구임을 알 수 있다.

읍동마을에서 보도블록으로 사용되었을 와전(瓦塼)도 다수 발굴됐다. 당시 장보고 선단은 산동반도의 적산포에서 청해진을 연결하는 해로로 취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흑산도 읍동마을은 장보고 해로의 중간 기항지로서 보도블록이 깔리고 다수의 건물이 들어선 국제해양도시로 성황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혼자 피해온 백제 왕자, 그 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을 때 백제의 왕자가 피란한 곳이 흑산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9세기 일본 교토 엔랴쿠지(延曆寺)의 승려 엔닌(圓仁)은 9년간(838~847) 당나라에 머물며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활동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그의 책에서 재당(在唐) 신라인의 활동상과 장보고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일본에 귀국할 때 산동반도를 거쳐 충청도 먼바다를 통해 고이도(신안군 압해읍)에 이르렀다. 그는 여기서 들은 흑산도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드론이 잡은 흑산항 전경. 흑산도 뒤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섬이 영산도다.
 드론이 잡은 흑산항 전경. 흑산도 뒤로 외롭게 떨어져 있는 섬이 영산도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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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도의 서북쪽으로 백리 남짓한 곳에 흑산도가 있는데 섬의 모습은 동서로 다소 길다. 듣자니 이곳은 백제의 제3왕자가 도망하여 피란한 곳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300~400가구가 산 속에서 살고 있다."

백제 패망 이후 의자왕과 왕족들은 대부분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셋째 왕자는 어떻게 흑산도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일까. 흑산도를 피란지로 삼았던 제3왕자의 그 후 소식은 이어지지 않는다. 역사에서  패자(敗者)의 아픔은 승자의 함성과 진군 나팔속에 묻혀버린다.  

덧붙이는 글 | 강봉룡 외, 《섬과 인문학의 만남》, 민속원, 2015
전남문화재연구소, 《신안 흑산도 고대문화 조명》, 혜안, 2016
최성환, 《신안여행을 위한 문화관광 가이드북》, 신안군, 2023


태그:#신안천사섬, #흑산도, #무심사, #진리당, #흑산도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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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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