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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편집자말]
필자가 진주 봉강리에서의 발굴 모습
▲ 발굴현장 필자가 진주 봉강리에서의 발굴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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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그날까지15] 홍역약 대신 독약, 한약방 주인의 사악함(https://omn.kr/26ij5)에서 이어집니다.

전미경의 어린 시절의 고난

회장님 아버지가 살인자로 사형당했다는 사연은 충격적이었다. 그 고난의 세월을 어찌 살았을까. 나 같으면 못살았을 것 같다. 그의 아버지 사연은 끝이 없었다. 통화를 할 때마다 사연은 더욱 더 힘겨운 내용이었다. 고난한 삶의 연속이었다. 보통 사람으론 상상할 수 없는 사연들이 줄줄이 나온다. 전화는 보통 한두 시간 이상, 회장님 사연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저는요, 2살 때 아버지가 학살된 후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친구였기에, 서로 의논해 제가 3살 때 생모를 재가시켜 버려유. 그 후 저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조모, 조부 슬하에서 자라유. 두 분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버지 죽음에 대해 말씀한 적 없었시유! 아버지가 끌려갈 때유, 저는 군홧발에 차였고 할머니는 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맞아 탈골됐고 고막 터져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청각장애자로 살았시유."

그가 11살 때인 1958년, 면사무소에서 직원과 경찰들이 인구조사를 하던 때였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어디 갔냐? 작은아들한테서 편지가 왔느냐?"며 시시콜콜 물었다. 순간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네놈들이 우리 아들을 죽여 놓고, 뭐시 어째?" 하며 쇠스랑을 들고 "이놈들 다 죽여야지" 하며 달려들었다.

"기겁한 공무원들은 무서워서 달아났지만, 그때부터 할아버지 정신은 임종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았시유. 그래서 할아버지 대∙소변을 3년간 6개월을 받아내었시유. 아휴 말도 못해유. 제가 그렇게 험난하게 살았시유. 제 인생 생각하문유. 너무 억울해서 잠을 잘 수가 없시유. 제가 그렇게 살았시유. 회고해보면 제 인생은 아무것도 없어서 억울해서 잠이 안 와요."

가만히 듣고 있으면 필자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사람의 인내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싶다. 무슨 말로 회장님을 위로해 드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회장님 도대체 어떻게 사셨어요 물으면 '그래도 살아냈시유, 이렇게 살아있시유' 하신다. 통화는 계속된다.
 
담임 선생님의 회초리 사건


"회장님 안녕하세요." "히히히 예 안녕하세요." 둘이서 또 한참 웃는다. 사연은 슬프지만 자꾸 웃는다. 이제 통화가 더 길어진다. 식사 시간을 놓칠 정도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편해진 것이다. 사실 유족 입장과 유족과 비유족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회장님의 사연이 끝이 어딜까 싶다. 통화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이런 험난한 삶도 있을 수 있구나. 과연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제가요 11살 될 때까지는 그래도 행복했어요. 할아버지가 자책하면서 우리 애기가 이렇게 됐다고 하셨어유. '내가 죄인 중 죄인이다' 하면서 저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어떤 행동과 말을 해도 다 받아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실 정도로 애지중지 보호하셨시유. 제가유 5살 때부터 아버지 큰 신발 싣고 다니면서 무릎이 성한 날이 없었시유. 그래서 할아버지가 무릎 보조대를 해주셨시유. 아무리 신지 말라고 해도 아버지 신발을 끌고 다니더래유.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끝나고 저의 고난은 여기부터 시작됩니다. 할아버지는 경찰이 다녀간 후로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정신도 온전하지 못해 손녀 미경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늘 집안이 시끄러웠시유. '고모는 네 때문에 네 보려와서 오빠가 잡혀가서 죽임을 당했다고 맨날 저 탓으로 돌려서 그렇게 저를 미워했시유.'

어느 날 할아버지가 퉁방울눈을 하고 아무 말 없이 눈알만 좌우로 굴렸어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어유. '할아버지 뭐 불편한 거 있어유? 큰 거 보셨구나!' 저는 할아버지 바지를 내렸시유. 순간 시큼하면서 지독한 똥 냄새가 진동했고, 똥 묻은 바지를 광주리에 담아 터벅터벅 걷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순식간에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똥 묻은 바지는 마을 개울에서 못 씻고 1키로 미터 떨어진 논 웅덩이에서 씻어야 했시유. 돌을 가지고 웅덩이 얼음을 깨고 맨손으로 바지를 빠는 것은 어린 저에게는 고역 중의 고역이었시유.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며 빨래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손가락은 파란 심줄이 돋고 손등이 얼어 터져 피가 흘렸시유.

집안일로 그날은 쪽잠을 잤으니 늦게 일어났고, 얼른 할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고 학교를 향했는데 2교시 지난 뒤 였시유. 슬금슬금 자리로 가 앉았지만, 담임선생은 불효령 떨어졌시유. '전미경 뭐하고 이제 와? 썰매 타다 늦었지. 이리 나와.' 젖은 치마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다그쳤지만, 가정형편의 상황을 전혀 말씀드리지 않았어유.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치매와 중풍으로 똥 바지 씻느라 늦었다는 말을 아예 하지 않았시유. 그땐 창피했다. 친구들 앞에서 그런 말이 정말 싫었시유.

'대답이 없자 손 내밀어!'라고 하며 대나무 휘초리로 손을 내리쳤다. 휘초리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고 손바닥이 터질 것 같았어유. '하나, 둘, 셋... 열' 열대를 맞고 제자리에 앉으니 머리가 핑 돌았어유. 그날 밤 저는 손에서 불이 났어유. 손이 너무 뜨거워 방문을 박차고 장독대에 쌓인 눈에 손을 넣었는데, 눈이 녹으면서 김이 나왔어유. 순간 콧등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시유. 몇 개월 후 저는 4학년에서 학업을 멈추어야 했시유. 동네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돌을 던져 피투성이가 되는 일이 잦아서 할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시유."
 
재흥아 보이느냐, 이 나쁜 놈

 
아버지 동갑 친구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논 가운데 연못에서 할아버지 빨래를 하며
유성기에서 배운 앵두나무 처녀를 소리쳐 불렀다.

"미경아"
들에 가시던 아버지 친구
제동이 아저씨가 불렀다.

"좋으냐."
"예, 아저씨."
"여름에는 손도 안 시리고 시원해서 좋아요."
그런데 할아버지 바지가 너무 커서 짤 수가 없어요."

신발을 벗어 놓고 물속으로 들어오신 아저씨

내종아리에서 피를 빨아
새끼 손가락 같은 거머리를 떼어

논으로 던지고
빨래를 짜
길 위로 올려 주고

하늘을 올려
재흥아, 네 새끼 보이느냐, 이 나쁜 놈

1959년 7월 어느 날 일기장에서
 
전답과 본가를 팔아버리는 고모와의 갈등

회장님과 또 전화 통화를 했다. "대전 시굴은 계속하고 있나요?" "예, 그런데 아직도 유해가 안 나와유. 이제는 반대쪽 산기슭으로 파본다고 하네유. 걱정이네유. 유해가 안 나왔어유. 그래도 지켜봐야지유."

다시 구구절절한 사연은 계속된다.

"아니, 일년내내 농사꾼 뒷바라지해 수확한 농작물은 고모들의 차지가 됐시유. 고모 두 분은 할아버지와 제가 연명할 최소한의 농작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가져갔시유. 제 살아온 세월이 이랬시유." 수화기 너머로 흐흐흐 흐흐흐 우는 소리가 난다. 필자도 함께 따라 운다.

"예? 친정아버지와 어머니 돌봐준 어린 조카에게 고마워는 못할망정 어른 조카가 농사지은 것을 고모들이 다 가져가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회장님!"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저는 방황하기 시작했시유. 삶의 의미도 없고 상실감에 사로잡혀 수면제 20알과 쥐약 1병을 마셨시유. 그런데 누군가 위 세척을 시켜서 간신히 살았지만 2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즉,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인 저를 고모들이 13살이나 연상인 남자에게 강제 결혼을 시켜버렸시유.

"예? 강제 결혼 예? 도대체 고모들이 왜 그랬어요?"

"아마 재산을 자기들이 챙길려고 그랬던 것 같아유. 고모들은 땅 10마지기와 세 식구가 살던 집을 모두 처분해 할머니만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버렸어유."

"회장님은 어디서 살아요?"

"친구네로 쫒아버렸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어린 제가 고모들이 재산을 가지고 가니깐 '그 땅 우리 아버지 거다' 하면서 팔아가지 말라고 소리치며 반항했시유. 그러니까 고모들이 저를 무척 싫어했시유."
 
백마강에서 귀신이 되길...


"안녕하세요. 회장님!"

"예, 안녕하셨어유!"

"통화 가능하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부여유. 예 가능합니다. 내일은 MBC에서 한국전쟁 72주년 기념으로 대전 골령골 발굴장과 대전유족회 전미경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 촬영 온대요. 부여집과 대전유족회 사무실 촬영하고, 발굴매장지 드러나는 모습도 촬영한대유.

"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저야 뭐 괜찮은데 촬영하시는 분들이 고생이지유."

"회장님 결혼해서 어떻게 사셨어요?"

"예, 결혼하고 보니 13살 연상인 남편과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어유. 그래서 다시 한번 삶을 포기하려고 백마강에 뛰어들었시유. 풍덩 소리와 함께 몸이 강바닥으로 쭉 가라앉았다가 하류로 둥둥 떠내려갔어유. 그러다가 모래톱에 걸려서 의식이 돌아온 저는 다시 한번 강물로 뛰어들려는 순간 강물속에서 웬 귀신이 있었어요. 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온 귀신이 써늘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유. 기겁을 한 저는 농사짓는 땅콩밭으로 돌아왔융. 원두막에 잠자고 있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 신세가 이런데, 내가 죽으면 저 자식도 똑같은 신세가 되겠지, 중얼거리며 죽음의 기운을 몰아냈시유. 백마강에 비친 귀신은 바로 저 자신이었시유.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일을 했시유. 보따리 장사, 여관 식모 등 전전했시유. 하지만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용실 기술을 배웠시유. 1980년 100만 원을 대출 받아 미용실을 차렸어요. 낮에는 생업인 미용실 일하고 밤에는 소머리해장국을 끓여 선동리 노인들을 만나는 일과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시유. 미용실은 번창해 세 자녀 대학까지 가르치고 노후생활을 준비하게 해 준거여유."
 
대전 유족회장의 부여 미용실
▲ 전미경 자택 대전 유족회장의 부여 미용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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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 식구들에게 '빨갱이'라고...


고모들이 전답과 집을 팔고 할머니만 모시고 가버렸는데 할머니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보고 싶었죠. 할머니가 보고 싶었는데 차비(45원)가 없어서 못 갔시유.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조기를 소금에 간을 해서 짭짤하게 해놓은 걸 우리 애기 좋아한다고 단지에 넣어서 부여시장에 오는 인편으로 보냈시유. 그 생선을 반찬으로 올려놓으면 시어머니는 저를 애비 잡아먹고 빨갱이 두목 집안에서 준 거라고 먹지 않았시유.

어느 날 땅콩밭에서 일을 하는데 까치가 머리 위에서 울었시유. 그런데 저녁에 전보가 왔시유. 할머니 돌아가셨다고유. 초상집을 가야하는데 큰아들 기저귀가 없어서 이불깃을 잘라서 기저귀 만들어 채우고 초상집에 갔시유. 그동안 할머니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추석이 지나도 우리 애기가 안오네 하면서 매일 정자나무 밑에서 담배 피우시면서 손녀가 언제 올까 기다리다가 화병이 걸려서 돌아가셨데유. 그 소식을 들으니 설움이 더욱 북받쳤시유. 그 동네에 함께 시집을 온 새댁이 하는 말이 부여미용실 전미경 여자만큼 불쌍한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기여! 아이고 불쌍해! 아이고 불쌍해! 정말 불쌍해! 그랬시유."
 
참고도서: 전숙자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인권평화연구소, 2017년 3월 9일

* 17화 골령골 전미경 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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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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