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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우리 역사는 출중한 인재들이 제명에 살지 못하고 비명에 스러지는 숱한 경우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살아서 소신을 펴고 개혁을 이루었다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란, 안타까움과 아쉬움 따른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사헌부 감찰과 찰방을 지낸 아버지 원강과 어머니 한양 조씨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때 반대파로 몰려 10년간 유배를 당한, 기골 있는 가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목구비가 훤칠하고 총기가 흘러 가족과 이웃의 눈길을 끌었다.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스승 없이 독습으로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다가 숙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열일곱 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아버지가 평안도의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하면서 조광조도 따라갔다. 근처인 희천에 큰 학자 김굉필이 유배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김굉필의 학식과 인품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만류에도 찾아 뵙고 배움을 청했다.
 
드라마 <조광조>. 배우 유동근이 조광조를 연기했다.
 드라마 <조광조>. 배우 유동근이 조광조를 연기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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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결혼을 하고 곧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올곧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던 조광조는 조정의 부패타락을 개탄하며 과거를 보지 않았다. 갑자사화로 스승마저 희생되자 그의 원망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자 29살의 늦은 나이에 진사시험에 1등으로 합격, 34살에 알성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에 이어 사헌부감찰·사간원 정언, 이듬해 호조·예조·춘추관의 서기관 등을 역임했다.

조광조는 중종의 경연을 맡았고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강론을 통해 오랫동안 그려온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주위에는 강직한 사림파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개 30대의 소장으로서 자임과 자신이 만만하여 왕도정치가 곧 목전에 닥쳐올 것을 기대하여 그 수단이 과격·졸렬하리만큼 급진적이어서 갈수록 보수파의 의심과 질투와 증오를 사게 되었다. 또 이들은 성리학에 의거하여 철인군주의 이론을 왕에게 역설하였으나 이상주의에 치우친 감이 있고, 심지어는 왕에게 강박에 가까운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으며, 또 소인·군자의 변을 반복하는 나머지 남곤·심정 등 기성 귀족들을 소인으로 지목하여 마찰음을 일으키는 등 그 저돌적인 의욕은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오게 하였다.(이상백, <한국사: 근세조선 전기편>)

조광조는 김굉필에 작록과 시호를 내리고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종사시킬 것을 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무속적인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사헌부와 사간원 합동으로 제기하여 이루어냈다. 이후 그는 사헌부 대사헌에 이어 원자보양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이상으로 내걸었다. "도학을 높이고 민심을 바르게 하여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다스림의 근본인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正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말미암아 행해질 수 없다고 하여 경연 석상에서 이를 역설하였다.

중종은 그릇이 크지 않은 군주였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의 개혁방안이 차츰 귀찮아졌다. 날로 인기를 더해가는 그의 위상과 포진한 면면들에 불안감이 쌓여갔다. 남곤·심정·홍경주 등 훈구세력이 이런 국왕의 심기를 놓칠 리 없었다. 온갖 모략과 음모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나무 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합치면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의미의 글자를 써 벌레들로 하여금 파먹도록 해서 임금에게 고자질했다.(<연려실기술>)
이와 관련 남곤의 종손인 의령 남씨 측의 남성우씨가 산림청의 협조를 얻어 나뭇잎에 꿀 등 여러 가지 단물을 발라서 실험을 해본 결과 벌레들이 단물만 먹었을 뿐 그에 따라 글자가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남곤 등을 미워하는 세력이 많았으므로 이들에 대한 유언비어성 말이 일종의 야담으로 전해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이종호, <정암 조광조>)

조광조는 물러날 뜻을 밝혔다. 하지만 훈구파는 그와 그를 따르는 세력으로 보아 언제 다시 권력의 실세로 복귀할 지 불안했다. 살려두기에는 두려운 존재였다. 임금도 같은 생각이었다. 국정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기득권 지키기에 선수들인 훈구파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그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조광조 일파는) 편을 가르고 당을 합하여 조정에 분란을 조성하는 나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자식이 아버지를 비판하는 태도를 곧다고 하고, 아우가 형을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하였습니다. 위로는 나라의 법도를 함부로 고치고 가운데로는 전하의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으니, 아래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야 할 도리를 무너뜨렸습니다. 신하로서 이런 엄청난 죄를 범했는데 (이들의) 목을 베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중종실록>권 37)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개혁론자 조광조는 38살의 젊은 나이에 전남 화순으로 유배를 갔다가 임금이 보낸 사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유배지에서 시 한 수를 남겼다.

대도(大道)가 오래도록 적막하니
이단들이 이제 우뚝하도다
휘휘한 천길의 물결은 흐르는 데
탁한 물이 푸른 물을 덮고자 하네
왕의 은택은 막혀 내려가지 않고
약한 백성 스스로 살 수가 없네
일찍이 옛 군자(君子)를 들으며
현군을 만나지 못함을 탄식하네
오직 때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임금을 위해 공평치 못함을 알려야겠네.

 
조광조의 영정.
 조광조의 영정.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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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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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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