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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 생활 26년 차 나름 베테랑 교사라고 자부하지만, 수능 성적표를 배부하는 시간만큼은 늘 긴장감이 감돈다. 뭔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전하고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아침 일찍 출근해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며 손편지를 썼다. 각기 다른 내용으로 쓰고 싶었지만 그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성적표를 배부하기 전에 읽어 주고는 학급 단톡방에 공유했다.
 
수능 성적표를 나누어주기 전에 아이들에게 쓴 손편지를 읽어주었다.
 수능 성적표를 나누어주기 전에 아이들에게 쓴 손편지를 읽어주었다.
ⓒ 신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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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나는 아이들의 낯빛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번호순으로 성적표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막상 성적표를 손에 든 아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대부분 올 게 왔다는 듯, 성적표를 확인하고는 누가 볼세라 감추기에 바빴다.

물론, 수시 최저학력기준을 충족했다고 탄성을 지르는 아이도 있었고, 등급 컷 경계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우는 아이도 한둘 보였지만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한 편이었다. 한 아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게 다가와서 "선생님, 저 재수학원 등록하려고요"라고 쿨하게 말했다. 나는 표정 관리가 안 돼 그냥 듣고만 있다가 "그래, 넌 잘 해낼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수능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수능 성적 확인하는 학생들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수능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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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문항이 사라졌다는 말을 믿고 내심 쉬운 수능을 기대했던 학생들은, 수능을 치르고 난 다음 날인 지난달 17일 학교에 왔을 때 이미 실망의 눈빛을 숨기지 못했었다.

사실, '불수능․물수능' 논란은 언론에서나 떠들어댈 뿐, 수험생들에게는 그다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상대평가 등급이 매겨지므로, 개인별 유불리는 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학력에 따른 서열화는 변할 게 없기 때문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이 누구나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수능 성적이 이렇게 나온 것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고, 대학 졸업 후 취업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라는 현실 인식이 아이들 뼛속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023년 겨울 대한민국 학교의 슬픈 자화상이다.
 
차량의 사이드미러에 새겨진 안전운전 당부 문구
 차량의 사이드미러에 새겨진 안전운전 당부 문구
ⓒ 신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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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의 사이드미러에는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Objects in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다른 자동차나 물체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가까이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수업 시간에 analogy, 즉 '유추(類推)'를 가르치면서 이 문구를 아래와 같이 인문학적으로 해석해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처한 현실(사물)은 눈(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차갑다(가까이 있다). 운전할 때 사고가 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하듯이, 현실의 벽이 예상보다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담임교사가 없다. 성인으로서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

수능 성적표를 받자마자 재수를 결심하는 아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기술을 배워 바리스타가 되겠다는 아이, 아르바이트 뛰어 돈 많이 벌고 나서 해외로 뜨겠다는 아이... 어떤 선택이든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본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나이 쉰 넘어 깨달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반 아이들이 받게 될 졸업앨범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갓생 필살기: The greatest hazard in life is to risk nothing(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이다). 젊음은 도전을 전제로 축복이 됩니다. 고등학교 둥지를 떠나는 10반 아이들 모두의 자유롭고 행복한 날갯짓을 기원합니다."

태그:#수능성적표, #담임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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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맘껏 놀고, 즐겁게 공부하며, 대학에 안 가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상식적인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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