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5 07:09최종 업데이트 23.12.05 07:09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서울 시내의 한 대학교 의과대학. 2023.11.27 ⓒ 연합뉴스


정부는 지난 10월 '필수의료 혁신전략'을 발표하고 의견수렴에 나섰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가 남았다. "언제 어디서나 공백없는 필수의료 보장" 이라는 구호는 있지만 정책 대안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필수의료를 담당할 의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의대 정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정책 대안이 특히 그렇다.  

의사 수를 늘려 봐야 수가는 낮고 위험은 큰 필수의료를 담당할 리 없고, 따라서 정답이 아니라는 반박은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대표 논거다. 증원에 찬성하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의사가 "남아돌게" 만들면 결국은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자리에도 의사가 흘러 들어갈 거라는 경제학의 수요-공급 논리를 내세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혁신전략 ⓒ 보건복지부

 
하지만 목표는 병원의 의사 부족 해소가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좋은 의료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의사 수를 늘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 아래 놓여있는 필수의료 기피의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다만 사회의 입장에서 질문을 설정해야 한다. 의사들은 어떻게 필수의료를 '기피'할 수 있게 되었나?

먼저 '필수의료'의 성격에서 출발하자. 필수의료의 합의된 정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책에서 주로 언급되는 영역은 소아, 응급, 외과 수술, 분만 등이다. 대체로 삶과 죽음의 문제와 직결되면서 의료의 긴급성이 높거나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과 불안이 커 빠른 대처가 필요한 의료가 필수의료로 호명된다. 분초를 다투지는 않더라도 진단이 어려운 질병, 진단은 됐지만 치료하기 어렵고 위험 부담이 높은 의료들이 필수의료이자 큰 병원의 몫이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환자를 기꺼이 살피는 대학병원 교수들이 최고의 의료 전문가로 인정받고 필수의료 현장을 "지킨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이런 의료는 불확실성이 높고 어떤 의미로든 위험도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병원이 24시간 7일 내내 운영되는 것도 이런 불확실성 때문이다. 높은 불확실성은 높은 비용으로 이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환자를 위해 24시간 문을 열어 놓고, 어떤 환자가 어떤 증상으로 올지 모르기에 여러 전문과목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상시 대기한다. 게다가 의사 한 명이 담당하는 진료 영역이 좁아짐에 따라 전화를 받으면 병원으로 달려 들어와야 하는 의사의 목록은 늘어만 가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에 근무 중이던 간호사가 사망한 사건이 그 예다. 서울아산병원에는 일하던 의사가 1784명이나 됐는데 뇌출혈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는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자유로운 개업과 시장 창출 권장한 정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0월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필수의료 혁신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필수의료의 본질적 위험을 피해 불확실성이 낮은 의료만 하는 길도 있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매우 작은 의료만 전문으로 제공하는 병원을 차리는 방식이다. 미용성형이 흔히 언급되지만 다른 분야도 가능하다.

하지정맥류, 시력교정술, 척추 수술, 통증 완화, 다이어트 치료 등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는 이미 받고 싶은 서비스가 구체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긴급한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드물고, 위독해질 낌새가 있다면 대학병원으로 보내면 그만이다. 가장 잘 치료할 수 있는 질환에 집중하기 위함이니 환자를 골라 받을 명분도 있다. 누가 올지 예상할 수 있으니 의사의 일을 진료보조 인력에게 나눠 주기도 수월하다. 상담실장과 코디네이터, 사무장 같은 직함을 단 사람들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수가와 의료 소송이 문제라는 오래되고 낡은 진단 뒤에는 불확실성과 긴급성을 떠넘겨 온 의료 시장이 있다. 높은 불확실성과 긴급성 속에서 위험 부담이 큰 환자를 진료하며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해 온 병원과, 불확실성을 줄여 위험을 최소화하되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병원이 분리되어 온 결과다. 정부는 필수의료의 가격을 건강보험으로 묶어두었을 뿐 민간의 자유로운 개업과 시장 창출을 권장하며 방치해왔다. 이 상황은 정부가 기대했던 의료산업의 고도화와 시장화가 맺은 결실인지도 모른다. 면허만 받는다면 고소득 개인사업자가 되어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의료시장을 창출해 냈으니 말이다.

의사의 면허는 숫자가 고정된 희소 자원이다. 한정된 숫자의 의사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정부는 사실상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실손보험의 힘을 입어 의료시장에는 돈이 흐르고, 의사들 역시 위험하고 힘든 필수의료 대신 안전하고 편한 데다 기대소득도 높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 병원에 남아 적은 월급, 긴 근무 시간을 감내하며 불확실성과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하지는 않겠다는 선택이 그저 요새 사람들의 특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미뤄버릴수록 이득이 되는 의료체계에서 누가 그런 선택을 할까? 명예와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회의 변화 역시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돈은 되고 소송은 피할 수 있는 의료만 하겠다는 지당한 마음들이 모여 필수의료 공백이라는 수렁이 깊어지고 있는 지금, 돈을 더 주고(필수의료 수가 인상) 경쟁은 늘리면(의사인력 증원) 문제가 해결될까? 적어도 의료의 형평성을 보장하는 데 시장은 실패했다. 반면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실패조차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돈 되고 소송 안 걸리는 의료만 하겠다는 마음이 만들어 낸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부하더라도 어떤 가치와 전문성의 양식을 기반으로 어떤 의사를 키워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그리고 이 모든 논의는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는 좋은 의료제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김새롬 /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예방의학 전문의) ⓒ 김새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새롬은 예방의학 전문의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건강재난통합대응을 위한 연구교육단의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 영역은 건강과 보건의료에서 시민참여와 공공성, 젠더와 건강, 건강 불평등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의 공저에 참여했고, 팀 블로그 'Health Socialist Club'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