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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기자말]
다산 정약용의 차남 정학유(丁學游·1786~1855)는 부친의 당부로 둘째 큰아버지인 정약전을 찾아뵈려고 험한 뱃길에 올랐다. 전남 강진을 떠나 영암 도씨포에서 벼 110석을 싣고 흑산도로 가는 중선(中船)을 얻어탔다. 화물이 무거워 배 허리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이 한 뼘도 채 안 되었다. 지금 같으면 쾌속선으로 세 시간이면 닿을 뱃길을 꼬박 여드레나 걸렸다.

마침내 흑산도가 바라다보이는 교맥도(蕎麥島) 인근에 다다라 점심을 먹었다. 교맥은 메밀의 한문 지명. 섬의 모양이 메밀을 닮았대서 생긴 이름이다. 지금은 매물도라 불린다. 학유는 교맥도 앞에서 난생처음으로 고래 다섯 마리가 바다 위로 솟구치며 소리치고 물기둥을 뿜는 장관을 보고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에 기절초풍 혼비백산 이야기를 남겼다.
 
막 밥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바다 가운데서 일어나니 하늘을 쪼개고 땅을 찢는 듯하였다. 뱃사공이 수저를 놓칠 정도였다. 나 또한 크게 놀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물어보니 고래 울음소리라고 한다. 이때 고래 다섯 다리가 나와 노닐며 멀리서 거슬러 왔다. 그중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물을 뿜는데, 그 형세가 마치 흰 무지개 같고, 높이는 백 길 남짓이었다. 처음 입에서 물을 뿜자 물기둥이 하늘 끝까지 떠받치는 것 같았다… 물을 뿜을 때는 고개는 치켜 등마루를 솟구치니, 마치 물건을 운반하는 큰 배와 같았다. 수면에서 몸을 뒤집자 검은 거죽이 몹시 어두웠고 비린내가 확 끼쳐 왔다. 겁이 나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흑산도 고래판장이 있던 곳에 고래공원을 만들었다.
 흑산도 고래판장이 있던 곳에 고래공원을 만들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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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날이 늦은 뒤에야 배가 흑산도 사리마을에 도착했다. 학유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유배 중인 중부(仲父) 약전에게 절을 올렸다. 흑산도 근해는 수온과 수심이 적당하고 조기, 멸치, 새우, 청어 등 먹이가 풍부해 대형 고래들이 찾아오는 어장이었다. 특히 흑산도는 해마다 산란을 위해 한반도 서해 바다를 회유하는 조기 군단의 통로. 고래는 조기가 산란장과 월동장을 이동하는 길목을 지켰다.

어부 목숨 구해준 고래

사리마을 주민 박남석(87)씨 집안에는 고래가 조상들의 목숨을 구해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남석씨의 아버지(경문)와 당숙 등 네 명이 흑산도 서남쪽 바다에서 조업 중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해 생사의 위기에 처했다.

다들 뱃전을 붙잡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데 거대한 고래가 나타났다. 고래는 배 밑창 아래로 들어가 어선을 받치고 흑산도 쪽으로 다가가 배를 등에서 내려놓았다. 어부들은 마을로 돌아가려고 허겁지겁 노를 저었지만 돌풍이 강해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때 저만치 멀어졌던 고래가 다시 돌아와 배를 사리 마을 앞 해변까지 밀어주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근해에서 조업하는 옛 한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 많았다. 대왕고래 같은 경우는 길이가 21~27m에 이르니 작은 배는 가랑잎처럼 등에 얹을 수 있다. 흑산 바다에서 가장 많이 나온 참고래도 길이 20m까지 자란다.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은 필자에게 "세계 각국에는 고래나 거북의 등에 업혀 살아남은 어부들의 이야기가 많다"며 "고래의 도움으로 함께 살아난 박한비(남석의 당숙·1892년 생) 씨의 아호가 족보에 사경(思鯨)으로 올라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고래의 은혜를 생각하라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다. 사리마을 사람을 구해준 고래 이야기는 이주빈의 논문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이름이 논문에서는 '경호 할아버지'라고 나온다. 결국 같은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다. 사리마을 함양 박씨들은 조상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해서 고래고기를 먹지 않는다.
  
관광선 옆에 모습을 드러낸 대왕고래. 수십 명이 승선한 관광선보다 고래의 전장(全長)이 길다.
 관광선 옆에 모습을 드러낸 대왕고래. 수십 명이 승선한 관광선보다 고래의 전장(全長)이 길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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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 근해에서 포경을 독점했다. 그러다 10년 넘게 고래 남획으로 동해에서 포경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1916년 12월에 흑산도 포경기지를 설치해 1917년 4월까지 고래 87마리를 포획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고래 남획이었다.

일본 포경협회가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1926~1944년 장생포 서귀포 흑산도 대청도 등 4개 포경기지에서 포획한 고래 3,130마리 가운데 27.4%인 858마리를 흑산도 기지에서 잡았다. 이 중 827마리는 참고래(긴수염고래), 28마리는 혹등고래, 3마리는 대왕고래였다.

흑산도 고래 파시는 일제 강점기에 번성했으나 해방과 함께 포경업이 금지되면서 지금은 맥이 끊겼다. 흑산도 항에서 고래를 해체하던 고래판장 자리에는 고래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 해에 고래 100마리 잡던 포경 근거지

일제는 1916년 흑산도 예리에 포경근거지를 설치했다. 고래잡이에 종사하는 일본인어촌이 들어서고 신사(神社)가 세워졌다. 
 
흑산도 일본인 어촌 고래마을에 있던 신사(神社)의 도리이. 두 기둥을 고래의 턱뼈로 만들고 두 기둥이 만나는 곳에 엉치뼈를 얹었다.
 흑산도 일본인 어촌 고래마을에 있던 신사(神社)의 도리이. 두 기둥을 고래의 턱뼈로 만들고 두 기둥이 만나는 곳에 엉치뼈를 얹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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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고래잡이 시기는 11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흑산도에서 해체된 고래고기는 시모노세키(下關), 고래 부산물로 만든 비료는 효고(兵庫)현으로 운송되었다.

일본 포경회사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고래고기로 줄 때도 있었다. 조선인에게 일을 시키고 조선 바다에서 잡은 고래고기로 월급을 준 날강도 사업 방식이다. 조선 노동자들은 고래고기를 흑산 비금 도초 목포에 내다 팔았다. 쌀농사를 짓는 비금 도초도에서는 고래고기와 쌀을 물물교환했다. 고래판장 노동자들에게서 산 고래고기를 목포 홍어집에서 술안주로 파는 풍습은 광복 후까지 오래 남아 있었다.

흑산도의 일본인 어촌 고래마을에는 바다의 신 곤피라(金比羅)상을 모시는 신사가 있었다. 일본 신사 앞에는 우리나라 절의 일주문(一柱門) 같은 도리이(鳥居)가 있다. 도리이의 양쪽 기둥은 고래에서 나온 턱뼈로 만들었고 두 기둥이 만나는 곳에 고래 엉치뼈를 장식으로 얹었다. 일제가 물러나면서 신사는 해체되고 도리이를 만든 고래 뼈는 흑산도 예리 여객선터미널 옆 자산문화도서관에 전시돼 있다.

조기잡이 배 2000척 몰려든 파시
 

파시(波市)는 파도 위의 어시장이다. 어업 기술과 운반·냉장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어장에서 잡아 올린 생선을 곧바로 바다 위에서 매매했다. 조기처럼 짧은 어기(漁期)에 높은 어획고를 올리는 어종들은 일시에 어장이나 인근 지역에 어선과 상선이 밀집했다. 파시의 근거지에는 목돈을 만지는 선원들과 선주들을 상대로 음식점 숙박시설 위락시설 선구점 점포 등이 들어섰다.
 
1960년대 조기 파시가 열린 흑산도 예리항.
 1960년대 조기 파시가 열린 흑산도 예리항.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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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조기 파시가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조기는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한 어종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제사상에도 반드시 조기가 올라갔다. 조기는 한국인의 입맛에 착 달라붙는 생선이어서 값이 싸지 않은데도 수요가 풍부했다.

조기를 바닷바람에 말린 것이 굴비. 단맛이 나는 3년 묵은 간수가 빠진 소금으로 조기를 간했다. 바람과 습도 일조량이 적당해야 좋은 굴비가 만들어진다.

조기는 겨울에 제주도 남서쪽 및 중국 상하이 동남쪽 근해에서 월동(越冬)한 후 2월경부터 산란을 위해 우리나라 서해안을 따라 서서히 북상했다. 흑산도 해역을 거쳐 3월경 위도 앞바다인 칠산어장에 도착해 산란을 했다. 4~6월경에는 연평도와 평안북도 대화도 근해로 올라갔다.

서해해역의 흑산도, 위도, 연평도가 전국의 3대 조기 파시였다. 영광법성포의 조기 파시, 비금도의 강달어(황석어) 파시, 임자도의 민어파시는 전남의 3대 파시로 꼽혔다. 흑산도에서는 파시가 연중 돌아갔다. 1~4월에는 조기 파시, 2~5월에는 고래 파시, 6~10월에는 고등어 파시가 형성됐다. 조기 파시가 흑산도에서 가장 일찍 형성돼 봄파시라고 했다.
 
흑산항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는 흑산도 아가씨 동상.
 흑산항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는 흑산도 아가씨 동상.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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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때 예리항 부두에 몰리는 어선이 많을 때는 2천여 척에 달했다. 밤이 되어 바다를 덮은 배들이 불을 밝히면 해상에 불야성(不夜城) 도시가 생겼다. 예리항 뒤편 '파시의 거리'는 1960, 70년대 흑산도 파시가 번성하던 시절에 형성됐다.

가족과 떨어져 파도에 지친 어부들을 유혹하는 환락가가 일시적으로 형성됐다가 사라졌다. 흑산도 갈매기(술집 아가씨)들을 상대로 하는 미장원, 술집, 다방이 번성하던 곳이지만 '파시의 거리'라는 표지석을 빼놓으면 파시의 흔적을 찾아보긴 어렵다.
 
파시의 거리 표지석.
 파시의 거리 표지석.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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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국해에서 저인망 안강망 등으로 조기를 싹쓸이하고 수온과 조류의 변화 오염으로 조기가 귀해지면서 조기 파시는 시들어갔다. 동력선과 냉장시설이 발달해 해상에서 직접 거래하는 어물 판매 방식은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흑산도 조기 파시와 고래 파시는 황금시대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고래공원에는 작은 고래상이 세워져 있는데 신안군의 의뢰로 크고 멋진 고래상이 제작 중이다.
 
국민가수 이미자가 흑산도에 남긴 핸드 프린팅.
 국민가수 이미자가 흑산도에 남긴 핸드 프린팅.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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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가는 방파제 입구에는 '흑산도 아가씨'의 동상이 서 있다. 1969년에 제작된 동명(同名)의 영화 주제가였다. 이미자가 노래를 내놓은 지 43년 만에 흑산도를 찾아와 콘서트를 열고 동상 옆에 핸드 프린팅을 남겨놓았다. 선객(船客)들이 예리항 여객선터미널에 내리면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와 흑산도에 도착한 것을 실감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강제윤, 《동아일보》 2023년 10월 6일 A29면 <사람 목숨 살린 흑산도 고래 이야기>
서종원, 《파시로 인한 지역문화 사회의 문화변화 양상 고찰-일제강점기 위도지역의 조기 파시 사례를 중심으로-》, 전국문화원연합회, 중앙민속학 제12호, 2007
이주빈, 일제 강점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연구, 목포대학교 대학원, 2017
정민, <새 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와 기행시>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2020 제79집
최길성, <파시의 민속학적 연구>, 《한국민속문화 연구총서》 5권, 1997


태그:#흑산도, #예리항, #파시, #흑산도아가씨, #고래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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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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