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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⑬] 눈꽃 속에 가려진 설화산의 속살(https://omn.kr/26hl5)에서 이어집니다.
 
연기군 남면 수멍재 학살 현장 및 비성골 발굴장 위치
 연기군 남면 수멍재 학살 현장 및 비성골 발굴장 위치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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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18년 아산 설화산 발굴 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 257-2번지(비성골)에서 발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간 유난히 마음이 설레었다. 누가 부르는 듯이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비성골로 향했다.

이 지역은 1950년 7월 초 조치원경찰서에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트럭으로 싣고 가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남면 공정리 은고개에서 집단학살 후 비성골에 매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은고개 일대에는 1지점과 2지점에서 학살이 있었는데 1지점은 여자를, 2지점에서는 남자를 학살하고 매장했다. 비성골 매장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가해자와 지휘명령 주체
  
충청남도는 전쟁 발발 다음 날, 상급 기관인 충남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을 시작으로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등 보도연맹원 포함 예비검속을 단행한다.

당시 충남 각 지방경찰서에 하달된 지휘·명령체계를 살펴보면 내무장관 백성욱(1950.2.7.~7.17)→치안국장 장석윤(1950.6.17.~7.17)→충남경찰국장 이순구(1949.6.20.~1950.7.20.)→각 경찰서장→각 지서 주임으로 내려졌다.

이러한 지휘·명령체계는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경찰도 군의 지휘∙명령체계에 속하게 되면서 계엄사령관(정일권)이나 헌병사령관(송요찬)의 지시를 직∙간접적(계엄법 제9조)으로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의 주공격 선상에 있던 지역에서는 후퇴하던 제17연대도 부분적으로 가해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지역에서 활동했던 특무대라면 방첩대(SIS) 대전 소속으로 추정된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육군무관 밥 에드워드의 보고서'에는 미군에 의해 촬영된 현장 사진이 설명과 함께 동봉되어 있다. 이것은 사살 현장에 미 대사관 직원과 미 극동사령부(FEC)소속의 장교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 정부도 충분히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런던 주재 미국대사관은 위닝턴의 이야기를 '학살조작(atrocity fabrication)'이라며 부인하였다. 미국은 자국민의 기자를 조작자로 모독했다.

비성골 학살의 배경
 
유해매장 추정지 입구 표지판 및 발굴단의 임시 사무실 컨테이너 모습
 유해매장 추정지 입구 표지판 및 발굴단의 임시 사무실 컨테이너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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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보도연맹사건 매장 추정지로 알려진 비성골은 행정중심복합도시 6-3생활권 내에 있다. 도시개발이 진척됨에 따라 한국전쟁 민간인 매장지인 비성골에 대한 유해의 존재 여부를 조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세종특별본부는 이 지역에 대한 유해 시∙발굴조사를 인류진화연구소(박선주 단장)에 의뢰해 실시하였다. 비성골 학살은 1950년 1∙2월경 연기군 보도연맹결성 후 예비검속은 6월 26일부터 7월 8일까지 시작되었고,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은 조치원 경찰서로 이송되어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인원이 너무 많아 임시창고에 구금되기도 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7월 8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학살된 인원은 200여 명이었다.

주인 잃은 고무신 행렬 

비성골에서 형(兄)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은 당시 건너편 능선 나무 뒤에 숨어서 형의 학살당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산등성 부근에 참호를 약 60~70m 이상 길게 판 후 사람들을 꿇어앉힌 채 총으로 사살하여 파묻었으며, 현장에는 약 100여구 정도의 시신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지금은 매장 추정지가 나무와 수풀로 우거져 있지만, 사건 당시는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현장 상황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매장지 길이가 60~70m정도의 구덩이 폭은 40~50cm 및 신발만 드러난 모습
 매장지 길이가 60~70m정도의 구덩이 폭은 40~50cm 및 신발만 드러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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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군인과 경찰이 후퇴한 후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갔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마을로 돌아왔더니, 마을은 이미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일부 유족은 비성골 이곳저곳에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이장했다. 경상도나 타지역은 깊은 산골짜기에 매장지가 분포되어 시신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말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경상도 지역 학살지는 거의 가지런히 눕혀서 행과 열을 맞추거나 너덜겅 같은 곳에 동그랗게 눕혀서 사살한 반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은 구덩이 폭이 40~50cm 정도 되는 곳에 꿇어앉혀 학살했다. 학살 과정이 더욱 잔혹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필자가 발굴하면서 구덩이에 쪼그리고 들어가 앉을 정도로 좁았다.
 
주인 잃은 검정 고무신만 출토된 모습
 주인 잃은 검정 고무신만 출토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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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독려로 시신 찾아가

비성골에서는 끝없이 검정 고무신만 출토되었다. 필자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궁금해 '왜 이 지역은 고무신만 나오냐'고 묻자 박선주 단장은 "당시 인민군들이 입성하자마자 주민들을 동원해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곳을 찾아서 시신들을 수습하도록 독려하였다"고 답했다.

순간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경상도는 언제 어디서 학살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태반인데, 이곳은 시신을 찾아가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내어 흙을 파기 시작했다. 살포시 검정 고무신 밑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반갑고 힘이 솟아 혼신을 다해 흙을 파고 또 파기 시작했다.  
 
필자가 발굴한 검정 고무신에 ‘증’이라는 상표가 표시된 모습
 필자가 발굴한 검정 고무신에 ‘증’이라는 상표가 표시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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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발굴한 검정 고무신에 ‘송’이라는 글자가 표시된 모습
 필자가 발굴한 검정 고무신에 ‘송’이라는 글자가 표시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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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살며시 비집고 나오는 고무신에서 '증'이란 상표가 보이자 하늘을 나르듯 기뻤다. 또 '송'이라는 성이 새겨진 고무신이 출토됐다. 자신 신발을 알리기 위해 표시해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피학살자들은 대부분 지식인이거나 부유층으로 추정되었다. 왜냐하면 출토된 고무신은 일반 검정 고무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급스럽고 상표가 거의 새겨져 있었다. 신기해서 단장에게 또 물었다.

"왜 신발에 상표들이 새겨져 있고, 굽이 있습니까?"
"여기서 출토된 고무신은 국산보다 외국에서 수입한 신발도 있습니다. 유학 다녀오는 길에 구입하여 가지고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필자도 어릴 때 얇은 검정 고무신은 보았지만, 굽이 있는 고무신은 처음 보았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신발은 밑창이 아주 두껍고 전체적으로 고무가 단단해 보였다. 수입품 신발이면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은 신기 어려웠던 고무신이라고 한다.
 
흙투성이로 발굴된 검정 고무신을 세척한 모습과 오른쪽 발굴된 상태의 모습
 흙투성이로 발굴된 검정 고무신을 세척한 모습과 오른쪽 발굴된 상태의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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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골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유해의 모습
 비성골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유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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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골 발굴지에 내린 가랑비

비성골 발굴 기간(2018년 6월 20일~6월 25일)은 장마철이라 안개와 비가 잦았다. 발굴장에서는 비가 오는 것이 가장 곤혹스럽다. 유해가 비를 맞으면 빨리 부식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성골은 유해가 적게 출토되었다.

가랑비가 휘날리는 날 발굴장을 바라 보았다. 대부분의 시신은 (유족이) 찾아갔지만, 무연고인 유해는 쓸쓸히 혼자 남아있다가 이제야 안식처를 찾게 돼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아닌가 싶어 매우 쓸쓸하고 착잡했다.

발굴장을 둘러싸고 있는 쭉쭉 뻗은 버드나무들도 발굴지를 감싸고 있었지만, '복합도시건설로 사라지게 되겠지' 하면서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안경호 국장이 발굴장 전체 배경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포크레인에 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위험을 감수하고 발굴에 전념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행정중심복합 도시개발로 사라지는 비성골 발굴지 옆 버드나무
 행정중심복합 도시개발로 사라지는 비성골 발굴지 옆 버드나무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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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씩 손이 철사로 묶인 채 머리에 총 맞아 죽어"

당시 갈운리 수멍재 현장 아랫마을에 살았던 참고인 신순용(당시 13세)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사살 당일 저녁쯤 경찰들이 와서 '여기서 사격 훈련하니까 집에서 나오지 말라, 나오면 큰일 난다'며 주민들을 전부 집으로 들어가게 한 후 엄청난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 지역의 피학살자 유족 대부분이 시신을 수습했는데, 사살 현장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비교적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참고인 송재진은 '구덩이 속에는 두 사람씩 손이 철사로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다'고 했다.
  
충청남도 지역의 피학살자들은 보도연맹원과 좌익혐의 등을 이유로 예비검속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좌익활동과 무관하게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장이나 이웃의 권유로 가입된 사람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살해 행위를 담당한 경찰과 헌병, 제17연대는 보도연맹원과 부역혐의자들의 불법행위 유무를 확인 절차 없이 사살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사살 명령이 언제, 누구로부터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공식적인 문건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러나 예비검속에 이은 총살 행위가 대전·충남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된 점과 상명하달식의 군·경 지휘명령 체계를 고려한다면, 불법 사살에 대한 지시나 명령은 상부 기관인 내무부와 국 방부 및 계엄사령부로부터 위임된 것이며 따라서 그 책임은 이들을 관리해야 할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15화 대전 골령골 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세종비성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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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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