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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조선왕조를 일관한 풍조의 하나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이다. 문인을 숭상하고 무인을 천시하는 풍조는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임진·병자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왜구는 거의 해마다 전국 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히까지 침입하여 온갖 약탈을 일삼았고, 특히 개국이래 가장 혹독한 임진왜란과 역시 개국이래 가장 치욕적인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무인은 홀대받고 국방은 여전히 허술했다. 그 결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을 당하게 되었다.

반면에 지나친 주자학의 형식논리는 번문욕례와 허례허식을 불러왔다. 왕대비의 장례를 3년상으로 하느냐 1년상으로 하느냐가 조정대신들의 담론이었으며, 민가에서는 젯상에 고기 머리를 동쪽으로 놓느냐 서쪽으로 놓느냐가 쟁론이 되었다.

고려조의 팔팔했던 대륙의 고토회복 정신이 조선조에서는 반도에 안주하면서 사대친명(事大親明) 정책으로 굳혀졌다. '당연히' 단군이나 고구려 관계의 서적은 잊혀지고, 이런 종류의 집필은 금제되었다. 이같은 풍토에서 무인이 천대받게 된 것 또한 당연시 되었다.

조선조에서 지금까지 가장 국민의 아낌을 받는 장수로는 김종서·남이·임경업장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업적으로나 인품으로 보아 참으로 유능하고 아까운 무장들이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는 너무 우연스럽게도 이들은 모두 비명에 갔다. 어찌 '우연의 일치'랄 수 있겠는가.

김종서는 계유정난 때에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쿠데타를 기도한 수양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인물로 김종서를 지목하고 결국 암살하고 말았다.

김종서가 누군가. 세종임금 때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7,8년간 북변에서 6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달달(達達)의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연할 때에 평안도 절제사가 되어 이를 토벌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다.

김종서는 탁월한 문신이면서도 무장이 된 인물이었다. 문종 때에 좌천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우의정이 되어서는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으며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그는 강직하고 엄정한 문인·학자이며 당대의 탁월한 사가로서 많은 사서와 실록의 편찬 책임을 맡았다. 학문과 지략 그리고 무인의 기상을 갖춰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들었다. 이렇게 문무겸전의 김종서는 수양의 권력욕에 희생이 되고 그의 꿈은 쿠테타세력의 칼날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조의 역사에서 남이(南怡) 장군처럼 연소기예(年少氣銳)한 무장은 일찍이 없었다.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는 17살 때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이어 서북변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토벌한 공로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26살 때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장관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참소로 병조판서에서 해직,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건주위 여진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읊었다는 시는 남이의 인물됨을 말해주거니와 결국 이것이 무고와 음모의 빌미가 되었다.

두만강 물 말 마시어 마르고
백두산 돌 칼 갈아 다하리라
사나이 평생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후세에 어찌 사내대장부라 하리오.

豆滿江水飮馬無
白頭山石磨刀盡
男兒平生未平國
後世稱大丈夫


한때 교과서에도 실려 어린 학생들까지 한문 싯구를 졸졸 외우던 시이다. 이 시의 내용을 전해들은, 평소 남이의 장부 됨을 시기해오던 조정의 간특하고 용렬한 대신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개높은 인물을 해치우고자 음모를 꾸몄다.

유자광이란 간신이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의 평(平) 자를 득(得) 자로 바꿔서 반역을 꿈꾸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의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고 나섰다.

불세출의 소년장군 남이는 유자광·한명회 등 간신들의 무고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국문 끝에 처형되고 수많은 측근 무사들이 역모로 몰려 사형되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대장군의 기예를 가진 임경업은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출중한 장수로서 제대로 청군과 한번도 싸워보지 못했던 것이다.

광해군 때에 아우와 함께 무과에 급제하고 이괄의 난을 맞아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라도 낙안군수로 재임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무찌르고자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향하였으나 이미 강화가 성립되어 다시 임지로 돌아가야 했다.

안변부사로 임명되어서는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청나라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임경업은 소시적부터 대장부의 담력과 패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늘 한숨 지으며, "내가 천지 정기를 받아가지고 났는데 물건이 아니되고 사람이 됐으며, 여자가 아니되고 사내가 되었는데 요 조그마한 나라에 나서 기운을 못펴고 일생을 보내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하였다고 한다.

백마산성을 얼마나 견고하게 축성하고 방비가 튼튼하였던지 후일 청태종이 쳐들어올 때 이곳을 피하여 곧바로 서울로 진격해 올 만큼 청태종은 장군을 두려워 하였다.

임 장군의 지략과 위엄이 이러하매 조정 대신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군사 2만 명만 붙여주면 청나라 수도 심양을 곧장 공격하여 함락하겠다는 소청에 임금 이하 대신들이 벌벌 떨면서 "많은 군사를 국경 방면에 있는 장수에게 보내줄 수 없다"는 해괴한 이유로 이를 묵살하였다.

정묘호란의 참담한 전란을 치르고 더 큰 환란이 예비되어 있는 데도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한 치 밖의 사정도 모르는 채 그저 하루살이와 같은 안일에 자족하면서 외적보다 정적이 더 강해질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임경업은 보통의 무장과는 달랐다. 그의 칼에는 이렇게 명(銘)이 새겨 있었다.

석 자 되는 용천검에 만권 되는 책이로다
하늘이 나 냈으니 그 뜻이 무엇이더냐
산동에 재상나고 산서에 장수난다
너희가 대장부라면 나도 대장부이다.


이런 기백으로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버린 조국을 구하고자 명나라 세력과 내통, 청에 대항하려 했으나 일이 탄로되어 명나라로 망명하게 되었다.

대륙의 정세가 명나라에게 갈수록 불리해지면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남경을 함락하자 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중 그의 부하였던 장련의 밀고로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나라에서는 그의 인품과 용맹 그리고 지략을 아는지라 부귀를 약속하면서 투항을 달래었으나 굴하지 않았다. 당태종도 보통의 인물이 아닌지라 그 충(忠)을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임 장군이 살아있음에 적국보다 본국의 대신들이 더 배 아파 했다. 김자점은 심기원의 모반사건에 임경업이 관련되었으므로 송환해 줄것을 청국 정부에 간청하고, 결국 묶여서 서울에 압송된 임경업은 지독한 고문 끝에 숨이 끊어졌다. 나이 쉰 세 살이었다.

임경업은 죽을 때에 남긴 말이, "천하 일이 평정되지 않았는 데 나를 죽여 되느냐!"고 탄식했지만 간신들에게 그런 탄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장도 함부로 죽이지 못한 충의의 장군을 고국의 간신들이 무고로 죽였지만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결코 그를 잃지 않았다. <임경업설화>와 <임경업장군신>을 통해 민족의 영웅으로 섬겨왔다. 사람들은 그가 잡귀를 쫓고 병을 낫게 하여주며, 수명장수와 태평을 가져다주는 신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겨지고 있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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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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