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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지금 우리나라 시가와 산문은 자기 나라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워 쓰고 있으며 설사 그것이 십분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바로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그런데 마을의 나무하는 애들이나 물긷는 부녀들이 서로 부르는 노래는 그것이 우리의 속된 말이라 하여 쌍스럽다고 하지만, 그 참됨을 가지고 따지면 소위 사대부들의 시나 산문 따위와는 같이 이야기할 나위가 못된다. (김만중, <서포만필>)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이고 아버지는 충렬공 김익겸, 어머니는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윤방의 증손녀, 이조참판 윤지의 딸이다. 그는 조선 중기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탯줄로 출생했지만 태어난 시기는 지극히 어려운 때였다. 후금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아버지는 무관으로 강화도를 지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임신 중인 어머니는 섬이 함락 직전에 다섯 살난 장남을 데리고 탈출하여 친정에서 김만중을 낳았다. 그는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유복자였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명문가 출신답게 학식과 교양이 깊어 전란기인 데도 두 아들을 잘 키웠다. 어머니의 훈도로 김만중은 15살 때 진사초시에, 이듬해 진사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의 비중 있는 관직을 지냈다. 장남도 급제하여 일찍부터 관직에 나갔다.

그는 명문가 출신인 데다 유능하여 경기 및 삼남지방의 암행어사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 인선대비의 상복 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삭탈관직의 고난기에 들었다. 30대 득의의 시절은 짧았고, 이후 곡절과 시련기를 겪는다.

그의 활동시기에 당쟁이 극심했다. 관료의 최상위급인 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1867년에는 숙종에게 바른 말로 진언하다가 역린을 건드려 평안도 선천에 유배되었다. 얼마 후 해배되어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1689년 숙종이 왕비 민비를 내쫓고 궁녀 민소의를 왕비로 삼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민소의가 아들을 낳자 이번에는 세자로 책봉하겠다고 나섰다. 전통시대에 '세자책봉' 문제는 권력의 핵심 이슈였다. 차기 권력의 향배가 따르기 때문이다. 줄을 잘못 섰다간 폐가몰락은 물론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세력간의 다툼이 치열하고, 기회주의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보신책을 택했다.

그는 일찍이 정언과 대제학을 지낸 원로대신으로서 아무리 임금이라도 인륜에 반하는 행위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왕의 면전에서 이같은 일을 추진하거나 동조한 반대세력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숙종은 김만중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멀리 경상도 남해로 유배시켰다. 임금을 모욕했다는 죄명이 무거웠다. 역사의 작용은 오묘하여, 개인의 비극과 불행이 국가·사회에는 큰 기여가 되는 무대를 장치한다. 관리의 길보다 문인·학자의 소양이 더 많았던 김만중은 부패하고 무도한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고 문인의 길을 걸었다. <서포만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을 유배지에서 썼다. 수필집 <서포만필>에 나타난 그의 문학관이다.

인간의 심정을 입을 통하여 표현한 것이 말이다. 그 말에 일정한 선율이 따를 때 시·노래·문·부(賦)가 된다. 여러 나라의 말이 각기 다르듯이, 인간이 각자 자기 말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선율로 표현하면 천지신명을 움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하등 한문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허균이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지 80여 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여전히 조정은 물론 일반 에서도 대부분 한자가 '진문'으로 통용되던 시절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멀리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다. 어머니는 아들의 소설이 완성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어머니의 임종 사실도 모르는 채 소설을 지은 것이다.

<사씨남정기>에서는 한 집안의 악독한 후처 이야기를 통해 숙종이 인현왕후를 쫓아 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은 일을 풍자하는 스토리를 전개했다.

그는 1692년 4월 30일, 그 외딴 섬의 유배지에서 쉰 아홉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정치가로서나 학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고독한 죽음을 맞았지만, 평생 가장 불행했던 유배 시절에 쓴 이 두 편의 장편소설이 전해진 덕분에 그는 우리 나라의 소설문학에 위대한 공적을 남기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혹은 그의 사상적인 보수성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고, 민중의 생활을 쓰지 않았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적인 향기가 높은 작품은 독자에 의해서 어떻게든 해석되게 마련이다. 그의 작품이 폭로한 양반 귀족의 부패상은 그 진실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가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언어로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도 모르는 사람들이 절찬하는 바이며, 그가 우리 문학의 발전에 공헌한 점은 모두들 입을 모아 칭송하는 바이다.(이은직 지음, 정홍준 옮김, <김만중과 그의 문학>, <한국사 명인전2>)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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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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