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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신라의 성골·진골의 신분제 이래 봉건적 신분질서는 유구한 역사와 함께한다. 변형된 신분제는 지금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왕족 외에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위의 세 집단은 양민으로 불리고, 천민은 다시 칠반공천(七般公賤)과 팔반사천(八般私賤)으로 분류되었다.

먼저 칠반공천은 1)기생, 2) 내인(內人), 3) 이족(吏族), 4)역졸. 5)노령(牢令),6) 관노비, 7)유죄 도망자를 말하고, 팔반사천은 1) 승려, 2)영인(伶人), 3)재인(才人), 4) 무녀, 5) 사당(捨堂), 6) 거사(擧史), 7)혜장(鞋匠), 8) 백정을 지칭했다.

'청백한 놈'이라는 허울좋은 명칭과는 반대로 '백정(白丁)'은 천민계급 중에서도 가장 하층에 자리 잡은 불우한 계층이었다. 백정의 '백(白)'은 "없다" 또는 "아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고, '정(丁)'은 '정호(丁戶)' 또는 '정인(丁人)'이라는 뜻이므로 백정은 정호 또는 정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한다. 고려시대에 이들은 조세와 군역에서도 제외되었다. 이는 조선조에서도 이어져 일반 평민 중에서 생활이 어려워지면 백정으로 변신하는 자의 수가 매년 증가하는 기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백정의 기원설에는 1)고려충신 72명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두문동에 칩거하여 생계용으로 동물을 잡아먹거나 버들가지를 이용하여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았다. 이성계 측이 이들을 끌어내릴 요량으로 신불을 놓자 전국으로 흩어져 살면서 산속에서 배운 도축과 고리 제품을 만드는 집단이 되었다는 설.

2) 신라가 망하면서 몰락한 귀족 출신들이 신분을 숨기고자 일반인들이 꺼리는 직종을 택하게 되었다는 설.

3) 단군의 아들 중 왕자 하나가 일부 부하에게 가축을 잡도록 지시하여 그 부하들의 후손이 백정이 되었다는 설.

조선왕조 시대에 백정은 엄격한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공공장소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집회를 가질 수 없었으며,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도 못하였다. 그들과 함께 길을 갈 때도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라 걸어야만 했으며, 그들 집에 가서도 뜰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야 했다. 이러한 차별은 대화에서도 나타났다. 백정들은 어른이건 어린아이건 모든 일반인들에게 존댓말을 쓴 반면에, 일반인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백정들에게 반말을 했다.

사회적 차별과 이름, 의복, 심지어 가옥에도 나타났다. 조선시대의 다른 천민들과 마찬가지로 성(姓)이 분명치 않았던 백정들은 이름을 지을 때에도 차별을 받았다.

인(仁), 의(義)·효(孝), 충(忠)과 같은 고상한 글자로 이름을 지을 수 없었고, 그 대신에 석(石), 피(皮), 돌(乭)과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김중섭, <형평운동연구>)

천민으로서의 백정이 신분적으로 해방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에서이다. 이 해에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신분해방 투쟁이 전개되면서 다급해진 정부가 갑오경장에서 노비해방을 밝혔지만 실제적으로 백정들의 신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그런 고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함이 본사의 주지(主旨)이라… 우리도 조선민족 2천만의 1인이라, 애정으로 호상 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존책을 기코자 자에 40여 만이 단결하야 본사의 목적과 그 주지를 간명히 표명코자 한다.

1923년 4월 24일 경남 진주에서 '백정 해방'을 위한 형평운동이 시작되었다.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백정출신 장지필(張志弼, 1898~1970년대)과 양반출신 김상호·신현수·천석구 등이 중심이 되어 형평사라는 사회단체를 조직하고, 앞에 소개한 창립 선언문을 공표하였다.

일제강점기였지만 형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백정들은 물론 일반인들이 참여하여 설립 1년 사이에 12개의 지사와 61개의 분사를 갖추었다. 형평청년회, 형평학우동맹, 형평여성동맹 등 별도 기관을 설치하면서 신분해방뿐만 아니라 교육개혁 등 민족문제에 참여했다.

그 중심 인물의 하나는 장지필이었다. 자신의 신분 때문에 정식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고 20살 무렵 진주에 살던 일인 지주의 도움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발군의 성적을 보였다. 3학년 때 양반출신 조선인 유학생들의 핍박 등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여, 지방의 청년운동가들과 형평사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형평사 운동은 이중의 핍박을 받았다. 여전히 기득권 상층부를 형성한 양반세력과 나날이 세를 더해가면서 목소리를 높여가는 데 불안감을 갖게 된 총독부의 감시·탄압이었다.

형평운동의 전국적 확산의 반작용으로 형평사원에 대한 테러, 우육 불매운동 등 이른바 반형평운동도 일본 경찰의 묵인 아래 진주를 시발로 힘을 키워 갔다. <경남일보> 문화부의 최정수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진주는 형평운동의 산실이자, 반형평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형평운동의 진척에 따라 운동단체 내부에도 여타 진보적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혁신파(북파·서울파)와 형평운동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보수파(남파·진주파)가 생기게 되었다.(…)

30년대 초 신간회 해소론의 제기에 대응하여 급진파가 비합법 활동을 위한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으나 장지필은 이를 무시하고, 35년 4월 대동사로 개칭되기까지 온건노선으로 형평사를 이끈다. 개칭에 즈음하여 장지필은 "형평운동이 일어난 지 12년이 지났는데 이는 선전, 사업, 실행의 3기로 나누어 착수하였다. 오늘날 이 3기의 과정은 실천되었기 때문에 형편운동은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사원들이 일반대중과 동일한 수준이고, 다른 것과 보조를 맞추어 운동을 발전시켜 간다는 의미에서 명칭을 새로이 고쳤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케가와 교수는 이것이 파시즘 아래서 운동을 연명시켜 가기 위하여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종석, <백정 손에 치켜 든 형평의 깃발>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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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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