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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편집자말]
암태도는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諸島)의 핵심 관문이다.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7.2km의 천사대교가 수문장 노릇을 한다. 천사대교를 건너면 암태도가 나온다.

2019년 개통된 천사대교는 특이하게 현수교(懸垂橋)와 사장교(斜張橋)가 한데 연결된 교량이다. 압해도 쪽이 현수교, 암태도 쪽이 사장교다. 그렇다보니 암태도로 들어갈 때와 암태도에서 나올 때, 천사대교를 지나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중간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차량이 오르내릴 때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무언가 통과의례를 치르는 기분이라고 할까. 
 
신안의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천사대교. 현수교와 사장교가 한데 연결되어 있다.
 신안의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천사대교. 현수교와 사장교가 한데 연결되어 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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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과 파마머리의 절묘한 만남... 매력적인 착시 효과

천사대교 건너 에로스서각박물관을 거쳐 암태도 중간쯤 들어왔다 싶으면 기동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암태도에서 가장 '핫'한 사진 촬영 장소다. 동백나무 파마머리 벽화가 있는 곳. 평범한 가정집 담장에 인심 좋은 노부부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그들은 파마머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파마머리 정수리 쪽이 담장 위로 튀어나와 있다. 희한하다 싶어 가까이 가보면 파마머리 윗부분은 그림이 아니라 실제 애기동백나무 두 그루다. 담장 안쪽 동백나무와 담장 외벽의 파마머리를 절묘하게 연결해 매력적인 착시 효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암태도에서 가장 ‘핫’한 장소인 동백파마머리 벽화.
 암태도에서 가장 ‘핫’한 장소인 동백파마머리 벽화.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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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여 년 사이 통영의 동피랑, 부산 감천마을, 서울 대학로 이화마을 등 전국 곳곳의 골목과 담장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졌다. 처음에 신선했으나 지금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의미도 맥락도 없는 내용을 상투적으로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형미까지 떨어지다 보니 처음 의도와 달리 '색깔 공해'로 전락했다.

그러나 암태도의 파마머리 벽화는 다르다. 벽화에 등장하는 두 노인은 바로 그 집에서 살고 있는 노부부다. 그렇기에 이 벽화는 장소의 맥락을 제대로 살린 경우다. 여기에 파마머리와 동백나무를 연결한 것도 절묘하고 참신했다.

처음엔 할머니만 그렸다가 그 후 할아버지 얼굴도 그려 넣게 된 이야기, 뒤늦게 할아버지용 동백나무를 구하기 위해 애를 먹은 이야기 등 흥미로운 스토리까지 담겨 있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세월이 흐르면 이러한 스토리가 이 벽화의 의미와 가치를 한층 더 높여줄 것이고 암태도의 멋진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이 벽화 가까운 곳에 '암태도 소작인항쟁 기념탑'이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1년 동안 암태도 소작농들이 친일지주 문재철(文在喆, 1883~1955)과 일제에 맞서 싸워 승리한 항일 농민운동이다.

1920년대 문재철은 소작료를 부당하게 올려 7~8할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소작쟁의를 시작했다. 암태도 오산마을 출신 서태석(徐邰晳, 1884~1943)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문재철에게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을 요구했다.

문재철은 이를 거부했고 소작인들은 추수 거부와 소작료 불납 운동으로 맞섰다. 일본 경찰은 서태석 등 농민대표를 구속했다. 그때부터는 암태도 단고리 출신 박복영(朴福永, 1890~1973)이 투쟁을 이끌었다. 소작인들은 더 강경하게 부딪혔다. 1차로 400명, 2차로 600명이 배를 타고 목포로 나가 목포경찰서 앞에서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결행했다.

아사동맹(餓死同盟)이라 부를 정도로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하자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원인 제공자인 문재철을 설득했다. 결국 문재철은 이에 굴복해 소작료를 4할로 내렸다. 소작인들의 승리였다. 
 
1923~1924년 소작쟁의를 기념하는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
 1923~1924년 소작쟁의를 기념하는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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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 기념탑은 1998년 세워졌다. 높이 6.74m로, 비문은 소설가 송기숙(宋基淑, 1935~2021)이 지었다. 일제하 농민운동 가운데 유례없이 소작인들의 승리로 이어진 암태도 소작쟁의. 올해 그 100주년을 맞아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 개정판이 나왔다. 1979~1980년 '창작과비평'에 소설 '암태도'를 연재한 송기숙은 1981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그때 송기숙은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사건을 소설화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이 사건 자체의 극적인 발전 과정도 흥미롭거니와 반봉건적 반일적 순수한 민중운동이 암태도라는 작은 단위의 섬에서 또 아주 밀도 있게 진행되어 민중의 의미를 관철시킨 것이 통쾌했기 때문이다. 매몰되었던 일상성에서 깨어나 자기의 삶을 찾아 몸부림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신선한 모습일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3인 3색... 한국 근대사의 빛과 그림자

암태도 소작인항쟁 기념탑과 동백나무 파마머리 벽화 사이에 옛 암태농협창고가 있다. 이곳에선 올 가을 소작쟁의 100주년 기념전시가 열렸다. 그림을 통해 적극적으로 현실 발언을 해온 서용선 화백의 작품이 농협창고 외벽과 내부를 장식했다. 지난해부터 수시로 이곳을 찾아와 소작쟁의 과정을 모두 10개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것이다.
  
2023년 가을 암태농협창고에서 열린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 기념전. 서용선 작가가 창고의 벽에 소작쟁의 상황을 10개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다.
 2023년 가을 암태농협창고에서 열린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 기념전. 서용선 작가가 창고의 벽에 소작쟁의 상황을 10개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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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쟁의 기념전 가운데 서태석의 얼굴 모습.
 소작쟁의 기념전 가운데 서태석의 얼굴 모습.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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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특히 서태석의 최후를 그린 대목이 인상적이다. 서태석은 세 차례의 수감 생활과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정신이상이 되었다. 결국 주변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압해도에서 벼 잎을 움켜쥔 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비극적인 최후를 그리면서 서용선 화백은 '하늘을 보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서용선은 그림 속에서 서태석의 눈을 부각했다. 부릅뜬 서태석의 눈은 결기로 가득하지만 어딘가 슬픔이 느껴진다.

이 농협창고가 오랫동안 미곡 창고로 쓰였으니 암태도 소작쟁의를 기억하는 데 제격이 아닐 수 없다. 한 신안군 관계자는 "이 특별전은 앞으로 상설전으로 전환되고 이곳은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관 역할을 하게 된다"고 했다. 서용선 화백이 사용했던 붓과 팔레트, 물감 등의 도구도 창고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기억하는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역은 서태석과 박복영이다. 투쟁 1년 동안 전반부는 서태석이, 후반부는 박복영이 이끌었다. 그 반대편에 친일지주 문재철이 있다. 그런데 이 3인의 삶이 흥미롭다. 서태석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운동가로 나아갔으나 3차례 투옥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이상이 되어 1943년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박복영은 임시정부계열 민족주의자로 활동했다. 친일지주 문재철은 이후 학교를 세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라운 변신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이들은 1920년대 전남 암태도와 목포에서 격렬하게 충돌했고, 이 시기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들이 선택하는 전형적인 세 가지 길을 걸어갔다"고 정리한 바 있다. 드라마틱한 3인 3색이다. 게다가 서로 대결하고 갈라서고 겹쳐지는 과정을 겪었다.

"이 세 사람의 삶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서로 교집합과 합집합을 만들어 냈다"는 정 교수의 평가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양상이 우리 근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 암태도 소작쟁의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암태도 오산마을엔 서태석의 생가터가 있고 그의 가묘(假墓)가 있다. 원래 이곳에 서태석의 무덤이 있었으나 200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2008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원래 자리에는 '의사 서태석 선생 추모비' '암태도 농민항쟁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역 서태석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비와 농민항쟁 사적비.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역 서태석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비와 농민항쟁 사적비.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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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팽나무, 바다가 어우러져 가장 아름다운 우실

암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356m의 승봉산이다. 승봉산 등산로 가운데 추포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사찰 노만사(露滿寺)가 있다. 건물은 대웅전, 칠성각 등 달랑 3채. 땀 흘리며 이곳을 찾으면 가장 먼저 세 마리의 개가 사람을 반긴다.

노만사는 대웅전 뒷면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쉼 없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바위에 서식하는 수령 100여 년의 송악도 볼 만하다. 육중한 바위 표면에 쫙 붙어 위로 뻗어 올라가는 소나무. 그 뿌리와 줄기가 바위를 뚫고 나온 것 같다. 놀랍고 신비로운 생명력. 100년 전 암태도 소작농들의 치열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암태도의 작은 사찰 노만사의 바위 표면에 바짝 붙어 자라는 수령 100여 년의 송악.
 암태도의 작은 사찰 노만사의 바위 표면에 바짝 붙어 자라는 수령 100여 년의 송악.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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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답사 여행에서 익금리 우실(마을의 울타리)도 빼놓을 수 없다. 신안의 섬 곳곳에서 우실을 만날 수 있지만 멋진 풍광으로 치면 익금리 우실이 단연 두드러진다. 1830년대 조성된 익금리 우실은 현재 북쪽 구간 40m 정도만 남아 있다.

육중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팽나무와 반듯한 돌담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그런데 담장 중간이 터져 출입문 같은 길이 나 있고 그 좌우로 수령 300여 년의 육중한 팽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그 너머로는 마늘밭과 바다가 펼쳐진다.
  
매력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익금리 우실.
 매력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익금리 우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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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좋은 가을 어느 날 이곳을 찾았을 때, 주민 몇 명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슬쩍 대화에 끼었다. 육지 얘기와 섬 얘기, 목포 얘기와 신안 얘기 나누던 중 한 분이 "여기 경치가 너무 좋으니 바닷가까지 꼭 산책하고 가라"고 했다.

우실을 끼고 천천히 바닷가를 돌았다. 우실에서 내려다본 바다도 좋았고, 바닷가에서 올려다본 우실도 좋았다. 바닷바람을 타고 마늘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암태도의 냄새라고 할까. 100년 전 소작쟁의의 뜨거웠던 외침도 바닷바람에 뒤섞여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송기숙, 《암태도》, 창비, 1981
박찬승,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과정〉, 《한국근현대사연구》 제54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10
정병준, 〈암태도 소작쟁의 주역의 세 가지 길:서태석 박복영 문재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1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최성환, 〈암태도 소작쟁의의 참여 인물과 쟁의의 특징〉, 《도서문화》 제56집,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20


태그:#암태도, #동백파마머리벽화, #소작쟁의, #노만사송악, #익금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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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서 문화부 기자, 정책사회부장, 오피니언팀장, 논설위원 등으로 일했고 현재 서원대학교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중들이 문화유산과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고 향유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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