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개인이나 나라나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그 반대는 물론 악업이다. 좋은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속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인이 이웃을 잘 못 만나면 이사를 가면 끝나지만, 이웃나라의 경우는 참담한 운명에 속한다.

이웃나라 일본 정부는 2023년 8월 24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다. 이로서 향후 최소 30년 동안 계속되는 오염수는 전세계 해양 생태계 파괴와 생존권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인류 공동의 자산이고 미래 세대가 살아갈 터전인 바다를 일본은 오직 자국의 이해에 따라 방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와 관련 윤석열 대통령은 반대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정부는 오히려 이를 두둔하는 언술로 국민의 분노를 샀다.

삼국시대부터 왜구라 불리는 일본의 도적떼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질러왔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7년 동안 우리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으며, 1910년에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오늘의 분단 원인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찾게 된다.
일본은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괴롭혔다. 반대로 조선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학자나 수신사를 보내 문화를 전달하고 문명을 일깨워주었다.

최초의 대표적인 인물은 백제 근초고왕과 아신왕 때 왕인(王仁, 생몰연대 미상)이다. 그는 전남 영암군 월출산 문필봉 기슭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기록의 하나인 <고사기(古事記)>와 그보다 약간 늦게 엮어진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왜왕이 백제 임금에게 청하여 학자를 모셔온 분이 왕인 박사였다고 한다.

그보다 1년 앞서 백제인 아직기(阿直岐)가 왜국에 건너갔다. 아직기가 유교경전을 술술 외우는 것을 보고 일황 오진(應神)이 "백제인에는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묻자, "왕인 박사가 있다"고 하였다.

일황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 박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백제 14대 근구수왕이 이를 가납하여 그를 보낸 것이다.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비롯 각종 유교 경전을 전해주고, 왜국의 태자 우지노 와키이라스코의 스승이 되어 가르쳤다.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이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선포하는 등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고,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에는 영토를 확장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정복국가로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근초고왕은 대내적으로 박사(博士)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는 등 박사제도를 두어 학문을 진작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동진(東晋)과의 교류를 통해 남조(南朝)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유식자(有識者)를 보내 문물을 전함으로써 일본의 문화형성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백제는 이미 유학을 수용하여 치교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광석, <왕인>, <한국인물유학사(1)>)

왕인 박사는 일본이 자기네의 원초격인 역사에 상세히 기록할 만큼 일본 문명사에 막중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나라의 사서에는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늘의 일본에서는 박사 왕인을 어떻게 받들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 오오사카(大阪)에 박사 왕인의 묘소가 장엄하게 모셔져 있고 도쿄(東京)의 우에노(上野)공원 안에도 박사 왕인의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그 외에도 왕인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유적이 많다는 것은 여러 종류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송지영,<그 산하 그 인물>)

왕인 박사가 태어난 마을에 1970년대에 유허비가 세워지고 학계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왕인은 또한 관상을 볼 줄 알았고,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지어 인덕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축하하였으며 일본에 건너갈 때 야공(冶工), 봉녀(縫女) 등 기술자도 대동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문화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왕인은 여러 전적을 통하여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왕인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일본 왕자와 군신들을 가르치고 한자의 왜훈과 왜음을 개발하여 시가를 것는 등 문화의 빛을 밝혀 문교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 이후 그가 전한 <논어>는 천하제일서로 치교의 근본이 되고,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학문 등 각 분야에서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양광석, 앞의 책)

 

태그:#겨레의인물100선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도교 대도주의 책임 맡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