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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1일, 타이완 섬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행은 벌써 10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사고 없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이 저는 서쪽으로, 더 서쪽으로 달렸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렀습니다. 2023년 10월 20일, 저는 이 대륙의 서쪽 끝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 있었습니다.
 
호카 곶
 호카 곶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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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을 떠난 기차는 40여 분만에 신트라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산길을 타고 달렸습니다. 언덕을 오른 버스 차창으로 탁 트인 들판이 나타났습니다. 뒤쪽으로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호카 곶"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를 맞아준 것은 거세게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모든 대륙의 끝은 이런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희망봉에서도 바람은 아주 거셌습니다.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잠시 시간을 보냈습니다. 0바위 아래 부서지는 파도와, 바위 위에 높게 선 탑을 구경했습니다. 날씨가 변화무쌍한지, 호카 곶에서 내려올 때 즈음에는 비도 짧게 지나갔습니다. 비를 몰고 온 바람을 피해 다가오는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호카 곶의 기념탑
 호카 곶의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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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대륙의 동쪽 끝, 말하자면 '극동'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사실 '극동'이니 '중동'이니 하는 말은 다분히 유럽 중심의 시선이 반영된 표현이죠.

하지만 저는 어쩐지 이 '극동'이라는 말을 썩 싫어하지 않습니다. 이 대륙의 동쪽 끝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에 오히려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유럽과는 너무도 먼, 대륙의 반대쪽 끝에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저는 이 '극동'이라는 말에서 발견합니다.

'극동'에서 살던 저는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10개월 기차로, 버스로, 비행기로, 또 가끔은 배를 타고 이 대륙의 곳곳을 여행했습니다. 그렇게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습니다.
 
벨렝 탑
 벨렝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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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야 대륙의 서쪽 끝에 닿았습니다. 한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져 있던 곳입니다. 이 넓은 바다를 건너면 무엇이 있을지도 알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 연재물의 제목을 '가자, 서쪽으로'라고 지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제가 이 여행에서 가진 목표는 서쪽으로 가는 것, 그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구를 서쪽으로 돌아 '극동'으로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제가 가려 했던 서쪽은 꼭 방향만을 의미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간 여러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와 네팔,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국가에도 들렸습니다. 유럽에 들어와서도 몇 번이나 국경을 지나 북유럽과 동유럽,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호카 곶
 호카 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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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렀던 수많은 나라에서, 저는 이 대륙의 서쪽이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을 자주 마주했습니다. 언어와 문화, 자본을 넘어 정치적 이념까지도 이 '서방'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서방'의 가치를 따라 서쪽으로 갈 것인지, 그들에게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갈 것인지를 두고 갈등하는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이러한 갈등을 겪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었겠죠. 서쪽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여행자인 저만큼이나 방황하고 있는 나라를 많이 만났습니다.

제 여행이 향하고 있는 '서쪽'은 어쩌면 그런 의미였습니다. 단순히 서쪽이라는 방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죠. '서쪽'의 나라와 역사 지금 우리 세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확인하는 것. 서쪽과 동쪽 사이에서 방향을 선택하는 것. 일방적인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서도, 서유럽의 근대가 우리 세계에 가져온 성취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 것. 저는 그 틈에서 무언가 대안을 찾고 싶었습니다. 극동에서 태어난 저는 그래서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엔트론카멘투의 시장
 엔트론카멘투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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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카 곶에 다녀온 다음 날, 저는 포르투로 향했습니다. 리스본에서 고속열차를 타면 세 시간만에 닿을 수 있는 도시입니다. 하지만 저는 고속열차를 타지 않았습니다.

포르투는 제 유럽 여행의 마지막 도시였습니다. 어쩐지 그렇게 쉽게 들어가고 싶지 않더군요. 포르투갈의 시골 마을을 지나는 완행 노선을 택했습니다. 덕분에 기차는 세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만, 그래도 그 덕에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도시의 시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는 경험도 해 봤습니다.

포르투에서는 별다른 일정 없이 며칠을 쉬며 보냈습니다. 포르투는 이름 그대로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처음 시작된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유럽 여행을 마치자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대륙의 동쪽에서 출발해, 대륙 서쪽의 포르투갈이 시작된 도시까지 도착했습니다.
 
포르투
 포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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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한때 세상의 끝이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이제는 대서양 너머에도 광활한 대륙과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 서쪽으로 향하는 제 여행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륙의 서쪽에 닿았지만, 서쪽보다 더 서쪽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포르투의 넓은 도루 강은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벅차도록 넓은 강과 바다, 그리고 육지를 잇는 다리를 바라봅니다. 이제 다시, 여행의 새로운 장을 시작할 때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포르투갈, #포르투, #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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