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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불이 깜박거렸다. 5초, 4초, 3초… 걸음을 재촉해 겨우 다 건넜다. 뒤를 돌아보니 신호등은 어느새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

무릎이 좋지 못한 할머니는 걷는 속도가 더 느리시다.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 병원 앞 횡단보도를 함께 건넜다. 반도 못 건넜는데 신호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2/3 쯤 건넜을 때는 이미 빨간불이었고, 차들은 빵빵 경적음을 울렸다.

할머니에게 보행 신호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경찰청 매뉴얼에 따르면, 횡단보도의 보행 신호 시간은 진입시간 7초에 횡단보도 길이 1m당 1초를 더한 초 수로 정해진다. 15m 길이의 횡단보도가 있다면, 7초에 15초를 더한 22초 안에 건너야 하는 것이다. 1m당 1초, 모두에게 넉넉한 시간일까? 강북구에 있는 한 횡단보도를 직접 건너보았다.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의 녹색불 시간은 32초, 매뉴얼을 착실히 따른 횡단보도였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자마자 평소 걸음걸이로 보도를 건넜다. 2/3쯤 건넜을까,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보도를 전부 건너고 뒤를 돌아보았을 땐 8초가 남아있었다. 1m당 1초, 건강한 성인 여성 기준으로 녹색불이 켜지자마자 걸으면 여유롭게 건널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거동이 힘든 노인들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던 70대 남성 A씨는 신호가 바뀌는 동시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빨간불이 된 지 5초가 넘어서야 보도를 전부 건넜다. 길가 한 켠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A씨는 "나는 잘 못 걸어서 제시간에 (보도를) 못 건너요. 전에는 빨리 움직이려다가 넘어진 적도 있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으켜 줘서 겨우 건넜죠"라고 한탄했다.
  
녹색불이 켜지자마자 보행기를 짚은 노인이 부리나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 강북구의 횡단보도 녹색불이 켜지자마자 보행기를 짚은 노인이 부리나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 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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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가 짧다 보니,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기 위해 무리하게 차도 앞에 서 있는 노인들도 있었다. 보행 보조기구를 짚은 80대 여성 B씨는 신호가 아직 바뀌지 않았는데도 차도 쪽으로 몸을 최대한 내밀었다. 그의 코앞에서는 차가 쌩쌩 달리고 있었다.

"위험한 건 알지. 근데 어째, 이렇게 안 하면 (건너는 도중 신호가 바뀌어서) 차들이 빵빵거리는데."

1m당 1초는 건강한 성인 기준으로는 넉넉하지만, 노인 같은 보행 약자 기준으로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를 고려하여 유동 인구가 많거나 보행 약자가 자주 건너는 횡단보도는 0.8m당 1초로 환산하여 보행 시간을 계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량 통행량을 생각하면, 모든 횡단보도에 보행 시간을 여유롭게 배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보행섬, 보행 약자에 어느 정도 도움 주지만 부작용도

원활한 차량 통행과 보행자의 안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현실적인 방법으로 '보행섬'이 대두되고 있다. 보행섬이란 횡단보도 건너는 도중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중앙에 설치하는 보행자의 대피섬을 말한다. 건축공간연구원에 따르면 보행섬은 횡단 거리를 짧게 하고, 보행자가 두 번에 걸쳐 보도를 횡단하게끔 만들어 신체적·심리적 부담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보행섬은 정말 보행자의 안전에 도움이 될까? 보행섬이 설치된 강북구의 한 횡단보도를 찾아갔다. 해당 보도는 앞서 나온 보행섬 없는 횡단보도처럼 6차선 차로에 설치되어 있었다. 두 횡단보도는 길이는 비슷했지만, 이곳의 횡단보도 보행 시간은 40초, 0.8m당 1초로 환산되었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재래시장 입구가 있어 유동 인구가 많고, 대다수가 노인이기 때문에 보행 시간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앞서 나온 횡단보도 보다 신호 시간이 1.25배 길었음에도, 한 번에 건너지 않고 보행섬에서 기다리는 노인들을 볼 수 있었다. 신호 두~세 번당 한 명 정도는 보행섬에서 쉬었다가 두 번에 걸쳐 횡단했다. 보행 보조기구를 끌며 걷는 80대 노인 C씨는 "시장에 올 때 항상 여길 건너는데, 힘들 땐 여기(보행섬)에서 잠깐 쉬다 간다"라고 말했다.

보행섬은 실제로 보행 약자들의 '숨돌릴 곳' 역할을 했지만, 늘 안전지대로 이용되는 건 아니었다. 보행섬을 무단횡단에 악용하는 사람들도 드물게 존재했다. 이들은 빨간불에 재빨리 건너 보행섬까지 도착한 다음,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맞은 편 보도로 뛰어들었다. 보행섬이 도리어 무단횡단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또 보행섬에 펜스를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보행섬과 차량 사이에 별다른 안전시설이 없어 차가 쌩 지나갈 때마다 마음을 졸였야 했다.

어디에 얼마나 설치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설치하느냐도 중요
 
 노인과 아기를 안은 엄마가 보행섬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 강북구의 횡단보도 보행섬  노인과 아기를 안은 엄마가 보행섬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 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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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를 위한 도로설계 가이드라인에 기재된 보행섬 설치 이미지.
▲ 보행섬 설치 가이드 고령자를 위한 도로설계 가이드라인에 기재된 보행섬 설치 이미지.
ⓒ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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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보행섬은 보행 약자에게 도움을 주지만, 제대로 설치하지 않으면 악용되거나 되레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고령자를 위한 도로설계 가이드라인은 보행자가 안전하게 대기할 수 있도록 보행섬의 폭을 2m 이상으로 설치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또 차량 충돌을 방지할 수 있도록 방호 울타리 등 도로안전시설을 설비하는 것을 지향한다. 보행자가 차량을 인지하고, 운전자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횡단보도를 엇갈리게 설치하는 것 역시 방법이다.

가이드라인을 지켜 보행섬을 설치한 횡단보도는 뭔가 다를까? 확인하기 위해 성동구에 위치한 횡단보도를 찾았다. 넓은 폭, 굳건한 펜스, 엇갈린 횡단보도 배치... 해당 횡단보도는 지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또 보도의 배치뿐만 아니라 신호까지 엇갈리게 설치하여 한쪽 보도의 신호가 끝나면 다른 쪽 보도의 신호가 켜지도록 설계되었다.

직접 이용해 본 결과, 확실히 달랐다. 우선 보행섬에 펜스가 설치되어 차량이 쌩쌩 달릴 때 드는 위협을 줄일 수 있었다. 또 펜스가 주는 위압감 덕에 쉽사리 무단횡단에 도전하기 어려워 보였다. 통행 방향에 따라 횡단보도가 엇갈리게 설치돼 차량이 어디서 오는지 인지하기 훨씬 수월했다. 두 보도의 신호가 다르게 운영되는 덕에 '녹색불이 끝나기 전에 보행섬을 지나야 한다'는 압박감도 덜했다. 무리해서 한 번에 횡단보도를 건너가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섬을 기준으로 신호가 엇갈리게 운영되고 있다.
▲ 성동구의 횡단보도 보행섬 섬을 기준으로 신호가 엇갈리게 운영되고 있다.
ⓒ 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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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갈 길이 먼 보행섬 설치... 도로 설계, 이제는 보행자 중심으로 가야

서울시도 이러한 보행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을까?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서울시의 각 구에 설치된 보행섬 개수를 물었다.

용산구, 영등포구, 관악구 등 개수는 물론 자세한 위치까지 짚어 주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 25개 구 중 총 12개 구가 '정보가 없다'고 답변했다. 심지어 강동구는 '0개'라고 답했다. 

2019년 기준 한국의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자 비율은 38.9%에 달한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인 19.3%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행정안전부는 올해부터 보행자 중심의 교통안전 체계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제대로 된 보행섬 설치는 그 노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구별 횡단보도 보행섬 개수 현황.
▲ 표 서울시 구별 횡단보도 보행섬 개수 현황.
ⓒ 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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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횡단보도, #보행섬, #보행약자, #도로교통,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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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유영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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