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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마운트 플러스의 신작 다큐 시리즈 크러쉬(Crush) 메인 포스터. 1부-골목, 2부-군중, 2부작이고 총 상영 시간은 90분이다. 생존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을 재구성했다.
 파라마운트 플러스의 신작 다큐 시리즈 크러쉬(Crush) 메인 포스터. 1부-골목, 2부-군중, 2부작이고 총 상영 시간은 90분이다. 생존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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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파라마운트사가 공개한 '파라마운트 플러스'의 신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크러시(Crush)>는 10.29 이태원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를 위한 비망록이기도 하다. 보디캠, CCTV, 휴대폰 영상과 언론 매체 보도 내용 등 1500시간 분량의 자료를 확보해서 꼼꼼하게 분석한 후 참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제작진의 노력이 빛난다. 마치 당일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시청자에게 선사한다. 이태원 참사를 보도한 어느 한국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몰입감이다.  

다큐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보는 이들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인터뷰와 자료 화면만으로 시청자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생존자, 목격자, 유가족, 그리고 기자
   
인터뷰 대상은 생존자, 목격자, 유가족, 기자, 네 부류다. 참사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 인터뷰 비중이 제일 크다. 다큐에 등장한 생존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지구 반 바퀴를 건너온 미국 유학생들, 스윙 댄스를 애정하는 일러스트 작가, 서울에서 패션 비즈니스를 시작한 미국 청년,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글쓰기를 시작해서 작가가 된 청년 등이다. 

목격자는 비번이라 이태원에 놀러 왔던 미군 병사들과 참사가 발생한 해밀톤 호텔 골목에서 오래 터를 잡은 옷가게의 주인이다. 유가족은 자신이 업어 기르다시피 한 남동생을 잃은 누나와 주한 미 대사관으로부터 아들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달받은 미국인 부모다. 기자로는 참사를 장기간 취재해 온 뉴스타파 소속 기자와 주한 BBC 특파원이 등장한다. 

이들의 개별적인 스토리는 참사가 어떻게 벌어졌고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퍼즐 조각이다. 다큐를 보다 보면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진다. 퍼즐이 다 완성된 후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찍힌다. 이 비극적인 참사의 책임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또한 어떻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물음표다.

인터뷰 대상자의 공통된 키워드, '트라우마' 
 
생존자 중 한 명이 이태원 참사 당일에 찍은 사진. 좌측 상단의 스티븐 블레시와 우측 하단의 앤 기스케가 사망했다. 가운데는 아리아나 이바라인데 앤 기스케와 룸메이트다. (좌측 하단의 사라 카마고 SNS 사진)
 생존자 중 한 명이 이태원 참사 당일에 찍은 사진. 좌측 상단의 스티븐 블레시와 우측 하단의 앤 기스케가 사망했다. 가운데는 아리아나 이바라인데 앤 기스케와 룸메이트다. (좌측 하단의 사라 카마고 SNS 사진)
ⓒ Param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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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미국 출신으로 어학당에서 만나 룸메이트가 된 두 미국 유학생은 참사 당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으로 갔다. 일행 중 2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던 룸메이트를 계속 졸라서 따라나서게 했던 학생은 살아남았고, 못 이겨 따라갔던 학생은 죽었다. 한국의 힙한 문화에 반해 서울에서 패션 사업을 하는 미국 청년은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당일 이태원에 갔는데 여자친구만 사망했다. 홀로 지옥 같은 골목에서 탈출한 청년은 천에 덮인 채 길거리에 놓여있던 많은 시신을 하나하나 들추면서 죽은 여자친구를 찾아야 했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엄마 역할을 해온 누나는 참사 당일 오전에 동생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것이 남매의 마지막 통화였다. 누나는 동생 사망확인서의 사망 시각이 불분명해 참사 현장 주변을 수소문해야만 했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직접 겪지 않았다면 결코 생존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다큐에 나오는 생존자의 시계는 대부분 2022년 10월 29일에 멈춰있다.

참사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생존자들

2부작 90분짜리 다큐는 생존자 인터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결론에 도달한다. 결론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코로나19 기간에 취소되었던 핼러윈 파티가 다시 열리면 이태원에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것을 누구나 예상했을 텐데, 왜 질서유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는지 생존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주한 BBC 특파원은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대규모 군중이 참여하는 시위를 잘 통제해 왔는데 이태원에서는 왜 그러지 못했는지 묻는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참사라면 한국 정부는 해야 할 일을 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찾아내는 일입니다." - 유가족 김나리 

다큐 속 외국인의 시선에는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참사가 겹친다. 모든 면에서 선진적인 한국의 재난 관리 시스템이 어째서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22년 이태원 참사는 예방하지 못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참사의 공통점은 희생자 대부분이 젊은 세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가가 가장 필요했을 때 국가는 현장에 없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여전히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있다. 이태원 참사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생존자인 미국인 청년은 답을 듣기를 원한다.

"너무도 의심스러워요. 참사와 관련해서 너무 많은 비밀과 침묵이 있습니다. 생존자 가족들뿐만 아니라 저도 지금까지 의아합니다. 도대체 언제쯤 해명을 들을 수 있는 건가요?" 

소중한 남동생을 떠나보낸 누나는 진실을 요구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지만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어떤 형태로든 마침표를 찍으려면 그날의 진실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 질문과 답
 
발리 폭탄테러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의 희생자 명단. 국적 별로 모든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있다.
 발리 폭탄테러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의 희생자 명단. 국적 별로 모든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있다.
ⓒ Badung Tourism De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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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많은 것이 잊혔다.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의 쿠타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있었다. 극단주의 이슬람 단체의 소행으로 토요일 오후 11시에 관광객으로 붐비는 나이트클럽과 그 주변을 타깃으로 삼았다. 대 테러전쟁을 하는 미국과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호주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클러빙을 하는 타락한 사람들을 처벌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테러로 20개 국가 출신 202명이 사망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테러 현장에 추모관을 만들었고 희생자 모두의 이름이 새겨진 추념비도 세웠다. 매년 테러 발생일에 '쿠타 카니발-생명의 축제'라는 행사를 열어 희생자를 기억하고 유가족을 위로한다. 축제로 승화시키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비극을 딛고 생명력을 회복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이태원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념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태원 참사는 잊힌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이기에 우리가 애써 외면했을 수도 있다. 다큐 <크러시>는 외국인의 눈을 통해 참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다큐를 시청한 많은 외국인이 생존자의 증언에 공감하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어째서 그런 참사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참사의 진실은 무엇이며,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 사회가 답을 할 때가 되었다.

태그:#다큐크러시, #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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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종교사회학과 국제정치학을, 인도네시아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현재 인도네시아에 한국 관련 콘텐츠를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관심사는 동남아입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여론형성을 하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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