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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리옹에 도착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여러 역에 서는 완행 열차를 탔는데도 두 시간이면 리옹에 도착할 수 있더군요.

그렇게 리옹과 마르세유를 여행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대표적인 도시들이죠. 두 도시는 프랑스 제2의 도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대륙을 돌아 프랑스로 돌아온 셈이었습니다. 그간 북유럽과 중부 유럽,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까지 여러 나라를 돌았습니다. 프랑스의 국기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파리를 떠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독일을 여행하다 잠시 국경을 넘어 스트라스부르에 간 것도 두 달 가까이 전이었습니다.
 
리옹 시청 광장
 리옹 시청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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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와 프랑스 사이에는 물론 국경 심사는 없습니다. 제네바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도시이니, 언어의 차이도 크지 않았죠. 하지만 선 뿐인 국경을 넘은 것만으로도 도시를 만나는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대륙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만난 프랑스는, 어쩐지 지난번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파리와 비슷한 부분도 있었지만, 남부 프랑스에서만 볼 수 있는 정취도 있더군요.

특히 큰 도시들보다 오히려 아를에 방문했을 때, 남부 프랑스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스텔 톤의 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문 앞에 꾸며둔 화분과 꽃도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가을에 접어든 날씨에는 햇빛도 그늘도 좋았습니다.
 
리옹의 카페
 리옹의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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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에는 고대의 유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를은 고대 로마에서도 중요한 도시였거든요. 고대 로마가 프랑스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요한 거점이 된 것이죠.

특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를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도 아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를 지역에는 중세 '아를 왕국'이라는 국가가 들어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프랑스의 중심지는 점차 마르세유로 옮겨 갔죠. 근대에 접어들며 아를은 점차 근교의 소도시로 축소됩니다.

그랬던 아를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1888년 2월 아를에 정착한 빈센트 반 고흐였습니다.
 
아를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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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한동안 네덜란드와 파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남프랑스의 경치에 매료된 반 고흐는 아를로 이주해 작품활동을 이어갔죠.

현재까지 유명한 반 고흐의 작품들은 대부분 아를에서 그려진 것입니다. <밤의 카페테라스>나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침실> 같은 작품들이 이 곳에서 완성되었죠. <해바라기> 연작 중에서도 아를에서 그려진 것이 많습니다.

아를에 거주하던 시기 반 고흐의 작품은 특유의 노란 색감과 뛰어난 빛의 표현을 완성해 나갑니다.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죠. 당시에도 일부 작품들이 파리 독립예술가협회 전시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 고흐의 아를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반 고흐가 고갱과 함께 살며 작품활동을 한 곳이 바로 아를이었죠. 반 고흐는 여러 작가들이 함께 살고 교류하면서 꾸리는 스튜디오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고갱은 그 제안에 응한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었죠.

반 고흐는 고갱의 방문을 아주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1888년 10월부터 함께 작업을 하게 되죠. 하지만 두 사람의 성향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결국 관계는 파국으로 끝나게 되죠.
 
아를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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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고갱과 다툰 뒤 반 고흐는 자신의 귀 일부를 잘라냅니다. 반 고흐는 다음날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반 고흐는 아를의 병원에 입원해 지내게 되죠.

며칠 뒤 반 고흐는 퇴원해 병원과 집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반 고흐의 불안정한 상태를 우려한 아를의 시민들은 반 고흐를 병원에 감금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반 고흐는 이듬해인 1889년 3월부터 다시 병원에 입원해 지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5월, 아를을 떠나 생레미의 요양원으로 떠났습니다. 다시 생레미에서 두 달을 지낸 반 고흐는 파리 근교의 오브르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권총 자살로 사망했습니다.

아를은 반 고흐가 애정을 가지고 지냈던 마지막, 아니 어쩌면 유일한 도시였습니다. 아를에서 반 고흐가 그린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밤의 카페테라스>를 테마로 한 카페
 <밤의 카페테라스>를 테마로 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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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가 만든 작품과 풍경은 아직 아를에 남아 있습니다. 왠지 반 고흐가 걸었을 듯한 골목길을 저도 따라 걸어 보았습니다. 꼭 상상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반 고흐가 그렸던 건물이나 유적, 공원이 아직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많이 있거든요.

아를에는 고대 로마의 공동묘지인 '알리스캉(Alyscamps)'이라는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반 고흐도, 고갱도 이 유적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죠. 반 고흐가 그린 <가을 낙엽>과 눈 앞의 풍경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듯한 조용한 풍경입니다.
 
알리스캉
 알리스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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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많이 달라진 풍경도 있습니다. 반 고흐가 입원했던 병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병원이 아닙니다. 건물에는 작은 카페와 기념품점이 들어섰습니다.

건물 한켠에는 지역 도서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외관과 달리 현대적인 시설의 도서관에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건물 2층에는 엑스-마르세유 대학의 강의실이 위치해 있습니다. 쉬는 시간인지 복도에 나와 떠들고 있는 대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이 보입니다.
 
아를의 병원이 있던 건물
 아를의 병원이 있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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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그림에서도 보였던 분수대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낡은 병원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이제 없습니다. 잠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이제 분수대 옆 잔디밭에 누워 쉬고 있었습니다.

작은 마을의 모습은 평화롭습니다. 반 고흐가 살았던 때에도 아를의 모습은 이랬을까요? 달라진 것들과, 달라지지 않은 것들을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프랑스의 정취를 느껴 봅니다. 파리에서 느꼈던 것과는 많은 것이 다르고, 또 많은 것이 비슷했습니다.

파리를 여행할 때 느꼈던 들뜸과 설렘은 없지만, 이 도시에는 편안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골목을 돌 때마다 보이는 아름다움은 그대로였습니다. 대륙을 돌아 다시 돌아온 프랑스에서, 다시 반 고흐의 흔적을 만났습니다. 파리의 미술관에서 본 반 고흐의 흔적과, 아를에서 만난 고흐의 흔적을 비교해 봅니다. 파리와 아를은 그만큼이나 달랐고, 또 그만큼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프랑스, #아를,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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