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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다시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기차는 세 시간을 넘게 날려 피렌체에 도착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두고 잠시 시내를 걷다가, 금세 프렌체의 두오모를 만났습니다. 아주 거대한 건물인 만큼, 피렌체를 걷다 보면 골목 틈 사이로 두오모를 보게 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바로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미켈란젤로 광장은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탁 트인 경치가 보입니다. 피렌체의 도심과 그 중심에 크게 들어선 두오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피렌체의 두오모
 피렌체의 두오모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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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두오모'라 알려진 이 건물의 정확한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입니다. '두오모'라는 것은 이탈리아어로 큰 성당을 뜻하는 말이죠.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은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소설의 배경으로도 유명합니다. 주인공인 준세이와 아오이가 재회하는 약속의 공간이죠.

두오모를 직접 보고 느낀 첫 번째 인상은, 생각보다 아주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오모가 피렌체의 랜드마크가 된 이유가 있었던 셈이죠. 비슷한 높이의 건물 사이에 높게 솟은 성당은 도시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골목에서 보이는 두오모
 골목에서 보이는 두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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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성당이 최종적으로 완공된 것은 1469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성당이 지어진 지 벌써 550년이 넘게 지난 것입니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봐도 압도적인 이 건물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피렌체 두오모의 돔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들 중에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철근 콘크리트를 동원한 더 거대한 돔은 만들어졌지만, 이렇게 벽돌을 쌓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것이죠. 교황이 거주하는 성 베드로 성당의 돔도 피렌체 두오모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피렌체에 이렇게 거대한 성당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당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문화와 기술을 선도하는 도시였으니까요.

피렌체는 이미 12세기부터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거대 도시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 복속되었던 때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귀족과 길드가 지배하는 공화국이었죠. 피렌체는 제조업과 무역업을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지중해를 통해 수입된 물건을 이탈리나 북부와 서유럽이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3세기 이후로는 직물업과 금융업이 크게 성장했죠. 특히 피렌체의 금융업은 유럽의 어느 도시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베키오 다리
 베키오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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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으로 성장한 가문이 바로 '메디치 가문'입니다. 교황청의 전담 은행을 맡았던 메디치 가문의 은행은 빠르게 성장했죠. 메디치 가문은 금융업뿐 아니라 양모 생산을 비롯한 제조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매디치 가문은 15세기 피렌체의 사실상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할 정도로 번영했죠.

메디치 가문은 그렇게 축적한 부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했습니다. 피렌체 두오모를 설계한 필리포 부르넬리스키 역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죠.

그뿐 아닙니다. 수많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거장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탄생했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조토, 마사초, 도나텔로,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활동했습니다. 피렌체는 꼭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지 않더라도, 여러 예술가와 교류할 수 있는 이탈리아 예술의 허브로 성장했습니다.

꼭 미술 분야만이 아닙니다.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단테는 지식인의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서민들의 구어에 가까웠던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습니다.

단테의 작품이 출판되고 유통되면서 각 지방에서 사용되던 방언이 하나의 '이탈리아어'로 수렴되기 시작했다고도 하죠.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표준어는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을 근간으로 합니다. 단테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후 르네상스 문화가 확산된 프랑스나 영국, 독일 등지에서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문학을 쓰는 추세가 만들어집니다. 단테와 피렌체는 그 출발이라고 할 수 있겠죠.
 
피렌체의 단테 박물관
 피렌체의 단테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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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피렌체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닙니다. 도시의 인구가 30만 정도에 불과한 곳이죠.

16세기에 접어들며 피렌체도, 메디치 가문도 점차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말 한 차례 피렌체 정치에서 축출되기도 했죠. 메디치 가문은 다시 돌아왔지만, 피렌체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고 있었습니다.

16세기 유럽 대륙의 주도권은 알프스 이북으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특히 카를 5세 시기 신성로마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죠. 카를 5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해 한때 로마까지 정복했습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의 역할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렌체의 산업도 쇠퇴하기 시작했죠. 결국 메디치 가문은 1737년, 잔 카스토네 데 메디치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토스카나 대공의 자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가 가져가게 됩니다.

그렇게 독립된 피렌체의 역사도, 메디치 가문의 역사도 끝을 맺었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이탈리아 독립 전쟁과 함께 이탈리아의 땅이 되었죠. 한때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지만, 이것은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차지하기 전, 로마로 향하는 전진 기지 역할을 수행한 것에 가깝습니다.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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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이 작은 도시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여전히 도시의 상징이 되어 광장 중심에 서 있죠.

메디치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은 안나 마리아 루시아 데 메디치는 1743년 사망했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예술품을 모두 피렌체 시에 기증하면서, 단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 예술품이 피렌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증한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남아 있죠.

메디치 가문은 단절되고 피렌체의 번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이 남긴 예술의 흔적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도시에 남았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죠. 피렌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이제 단절되고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피렌체의 두오모는 지금의 여행자에게도 똑같은 경외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정치보다 긴, 인생보다 긴 예술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겠죠. 피렌체의 두오모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화려했던 과거의 빛바랜 흔적만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를 타고 남아 여전히 같은 감동을 주는, 정치보다 긴 예술을 두오모의 돔은 상징하고 있는지도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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