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2 10:07최종 업데이트 23.10.1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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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2019년 4월 25일 국회 정개특위 전체회의가 예정된 회의장을 자유한국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점거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의 입장을 막으면서 대치하고 있다. ⓒ 남소연

   
"논쟁의 가열은 좋은 현상이지만 분노의 가열은 적대감을 양산한다. 지적 성찰이 도모하는 적대감의 해소가 지성의 힘이라면 이념적 낙인찍기, 궤변과 욕설로 상대 논리를 저지하기, 진영의 장벽을 높이 쌓아 올리기로 일관되는 한국 사회 공론장의 현실은 '지성의 몰락'의 슬픈 증거다." - 송호근 , <21세기 한국 지성의 몰락> 중에서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지적은 지성이 발붙이기 어려운 우리 공론장 구조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그의 말대로 '정치' 영역은 진흙탕 싸움으로 점철된 생존 투쟁의 무대임을 부정할 이가 많지 않아 보인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진단이다.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선 고작 20여 명에 불과한 친트럼프계 공화당 의원들이 하원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유럽에선 네오 파시스트 정당들의 득세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전 세계적 현상으로 치부하고 푸념만 하기엔 우리가 처한 현실이 위중하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문화역량 면에서 부쩍 토대를 넓혔지만, 여전히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채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기껏해야 '강소국' 입지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산과 역량을 끌어모아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국가를 휘청이게 할 외교 기조의 변화, 사회적 합의에 심각한 균열을 가져올 일방의 독주가 적절한 공론화 과정 없이 난무한다. 지도자의 말에서 품격과 사회 통합의 고심이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극단적 주장에 취해 진영 다툼에 휩쓸리는 이들이 몸통을 흔드는 '웩더독(Wag the Dog)'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바야흐로 민주공화국의 가치가 칼날 위에서 양단될 위기에 놓였다.

'공론장'의 복원 혹은 혁신이 필요한 배경이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소셜 코리아'는 지난 3개월여에 걸쳐 다양한 주체, 기관들과 협업을 통해 진단과 처방을 모색해왔다. 상업주의가 만연하고 권력의 통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포털에 장악된 언론의 현실과 함께, 시대의 문제를 마주 대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식인 사회의 변질을 목도한다. 아울러 시민의 지혜와 총의를 모아내지 못한 채 여론의 왜곡을 부추기는 공론장 파괴 현상이 도드라지고 있음을 뼈아프게 느낀다.

이 글에선 우리 공론장의 현주소를 현대사의 전개 속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뒤 지식인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대한 해법, 그리고 변화의 징후들을 찾아 제시해보고자 한다. 공동체 결속을 저해하는 자기파괴적 공론장은 정치를 극한 대결로 치닫게 하는 주된 배경이기도 하다. 극단적 정치의 정상화, 그 출발점에 공론장 정상화와 혁신의 과제가 있다.

붕괴한 '운동권' 공론장, 공공과 멀어진 학계·언론
 

1980년대 학원가의 대자보는 저항 담론을 이끄는 공론장의 역할을 했다. 1987년 이한열 열사 피격 직후 병원 출입구에 부착된 대자보.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한국 근현대사는 수난의 끝판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 공론장 참여는 목숨과 맞바꿔야 할 만큼 위중했다.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병자호란 당시 결사항전이냐 항복이냐를 놓고 빚어진 김상헌과 최명길 간 대립이 그러했다. 구한말 변변한 저항도 못한 채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이후 국권 회복과 재건에 이르기까지 견뎌내야 할 시련의 골은 깊었으며 지식인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지러운 외세의 각축전과 좌우 이념 간 극단적 대립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 많은 좌절과 희생을 겪어야 했다. 한국전쟁을 거친 남북 분단 고착화의 현실은 여전히 우리 사회 이념 지형을 가르는 뿌리깊은 골이며 공론장 정상화를 가로막는 구조적 요인이다.

민주화 시기 산업화 세력의 독재에 맞서 저항 담론을 앞장서 주도한 이들은 청년과 재야로 표방되는 지식인이었다. 이남희 교수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저항파 담론이 만개한 시기는 1980년대이다. 역사적 주체성 회복에 목마른 시기였으며 '민중'의 등장과 함께 지식인의 실천이 강조되었다.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운동권을 중심으로 반미 정서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악마화되었던 북한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 또한 운동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교수는 1970~80년대에 운동권이 '대항 공론장'으로 기능했다고 개념화했다. 이들은 지식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조직의 연줄망을 공고히 하면서 사회 세력으로서의 영향력을 키웠다.

대자보와 시위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획일적이고 순응적인 조직화에 갇힌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다. 1986년 5월 22일 대학가에서 북한 방송 청취를 공공연하게 알린 수단이 대자보였다. 1987년 일반 직장인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민주화항쟁도 운동권의 실천과 정당성 확보에 기인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민주화 실현이라는 환희도 잠시, 옛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맞물리면서 대항 공론장으로서의 운동권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1990년대 X세대의 등장 이후 대학가의 시위는 사라졌으며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으로 대표되는 시민 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 등 의회에 진출한 진보정당과 함께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진보 화두를 생산하는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명망가들의 앞다툰 정치권 편입 이후 공론장으로서 그 영향력이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주요 명망가들의 도덕성이 실추되고, 정책 구현 역량이 한계를 드러내 보이면서 현재는 시민사회 전반이 위축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운동권의 쇠락은 대학의 활력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 수십년 간에 걸쳐 학계의 사회 참여 열기는 지속적으로 사그러들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교수 평가제도, 대학 구조조정, BK21로 대표되는 국가 주도의 연구기금 분배, 지식 매체의 변화 등이 그 배경이다.

언론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긍정적이지 못하다. 언론이 '정론'을 추구하기보다 특정 이념에 매몰되거나 상업주의를 앞세우는 포털 뉴스 생태계 속에서 자율성을 상실한 채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제대로 된 공론장 복원과 정론 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실천 방안에 대해선 다들 고개를 떨군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공론장의 해법 찾기는 난망하다.

대항 공론장 복원 징후가 보인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담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서 보편적 호응을 얻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민주화 실천의 주도 세력인 586세대가 급격히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된 건 역설적으로 이들이 '권력'과 '도덕성 혹은 명분'을 모두 쥐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권력과 명분을 장악했던 586세대에게서 그간 우리는 공허한 이념과 '내로남불'의 이중성을 보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권위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급격한 진공 상태는 혼돈과 반작용을 수반한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희망의 징후들 또한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계와 언론, 시민사회는 물론 문화예술계를 포괄하여 다양한 실천의 모색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실천은 기성 구조에 갇히지 않는 저항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한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담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국경을 넘어 전세계에서 보편적 호응을 얻고 있다. <기생충>(2019)에서 빈부의 고착화와 구별짓기를, <오징어게임>(2021)에서 승자독식의 경쟁을 목도한다. 대항 공론장은 어쩌면 이미 대중문화 영역으로 중심 이동을 했을지 모른다.

대학과 연구자는 지식인 사회의 오랜 중심이었다. 반지성주의와 이념 대결이 횡행하는 사회적 분위기, 많은 대학이 존폐의 기로에 놓인 지금 역설적으로 지식인 사회의 새로운 자각과 역할 전환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다.

얼마 전 국내 연구자들이 모여 발행한 소책자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학계와 시민사회 내에서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며, <서울리뷰오브북스>에 서평이 소개되는 등 공론화의 과정을 밟았다. 해외 유학파와 주요 명문대 졸업생을 뜻하는 SKY학파, 지잡대(그외 대학과 지방대 등을 통칭)로 계급화하는 학계 현실, '학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국 대학원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진단하여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낡은 지식인 개념을 넘어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민간연구소 랩2050, 사단법인 시민, 사단법인 지식공유연구자의집 등은 '연구+활동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연구와 활동가의 역할을 병행하는 '연구활동가' 촉진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활동가들이 연구를 통한 전문성 축적, 시민과의 공감대 확산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 노동과 시민사회가 새롭게 연대하자는 취지로 지난 9월 21~23일 진행된 '2023 솔라시' 본 포럼의 세부 행사 다수가 '공론장'을 표방하고 나선 것을 봐도 많은 이들의 고민, 모색의 지점이 중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 전환(DX)의 시대를 맞아 미디어는 급격한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대항 공론장의 관점에서도 이를 어떻게 접목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한다. 디지털 시민 광장을 표방하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는 최근 시민의 공론장 참여 편의성을 개선한 캠페인즈 플랫폼을 선보였다. '소셜 코리아'가 참여한 공론장 포럼도 이 캠페인즈를 활용했다.

성공의 관건은 시민의 참여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끌어내 확산하느냐에 모아진다.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던 만화산업이 웹툰 플랫폼 생태계 조성을 통해 새로운 날개를 단 것처럼 공공영역의 플랫폼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자 기회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언론 자유의 이상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정보, 의견이 제공된다면 우리가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공공지식인의 자발적 참여는 그러한 정상화의 단초다.  극단적 주장의 대립과 포퓰리즘의 득세는 일시적일 뿐 우리 공론장의 영속적 모습이 될 수 없다. 
 

김중배 / <소셜 코리아> 책임편집위원 ⓒ 김중배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중배는 <연합뉴스>와 <연합뉴스TV> 기자를 거쳐 <소셜 코리아>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인 독립 언론인입니다. 미래 지향적인 정책·지식 생태계를 고민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집 <성남 사람들 이야기> 등을 썼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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