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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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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보게 된 사연 하나. <아무튼, 사전>이라는 책을 본 독자가 그 책을 출간한 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냈단다(서로 아는 사이인 듯). "이렇게 멋진 중제(아마도 제목 옆의 부제를 말한 것 같음 - 기자말)는 어떻게 뽑아요?"라고. 그랬더니 돌아온 말. "원고에 있는 말이에요 ㅎㅎㅎ"

나도 이와 비슷한 말을 종종 했더랬다. "제목 괜찮다"는 말에 별달리 할 말이 없을 때. 그 문장은 내가 지은 게 아니고 본문에 있는 내용으로 뽑은 게 사실이니까. 이 독자가 '멋지다'라고 한 문장은 '우리에겐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였다. <아무튼, 사전>에 잘 어울리는 부제 같았다. 

한 발짝 떨어져 보면

그런데 글 안에서 제목으로 쓸 만한, 적절한 문장을 찾으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그림자 한 조각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게 얼만큼인 거냐 물으면, 미안하다. 나도 정확히 몇 m쯤 된다고 말은 못 하겠다.

모니터에서 두어 걸음 정도 떨어뜨려 놓고 보면 되려나?(라고 쓰지만 그러면 글자가 안 보이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염려 마시라. 내 말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니까. 그보다는 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에 가깝다. 때론 곁가지를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중요한 건 이 부분이야, 제목은 꼭 여기서 뽑아야 해'라는 강박이 생겨버리면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 그렇게 억지로 뽑은 제목은 아쉽게도 재미가 떨어진다.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고민하다 '응? 이런 제목도 괜찮겠다' 싶은 게 튀어 나온다. 써놓고 보니 마음에 드는. 
 
시인이 사과를 들여다보듯 글도 그렇게 들여다보면 제목이 보이기도 한다.
 시인이 사과를 들여다보듯 글도 그렇게 들여다보면 제목이 보이기도 한다.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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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이 별건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하면 된다. 다르게 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다르게 보냐고? 시인의 말처럼 보면 된다.

"여러분 사과를 몇 번이나 봤어요? 백 번? 천 번? 백만 번? 여러분은 사과를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두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사과에 스민 햇볕도 상상해 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예요."

시인 김용택이 영화 <시>에 '김용탁 시인'으로 출연해서 할머니들에게 시 수업을 하는 장면이다. 제목을 뽑으려고 들 때 내 마음을 적어둔 것 같았다. 사과를 글로 놓고 보면 그랬다.

글 하나를 진짜로 보게 될 때 드리우는 제목의 그림자가 있다. 글을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도 읽어보고 사진이나 사진 설명 글에서도 찾아보고 기자가 적어 놓은 메모, 통화할 때 듣게 되는 이야기 등 글을 에워싼 주변의 모든 것을 탈탈 털었을 때 건져지는 문장. 본문에 없는 말을 지어내서 제목으로 쓸 수는 없다. 그렇게 제목을 뽑을 때 독자는 '낚.였.다'라고 말한다. 혹은 "본문부터 제대로 읽어라"는 말을 듣거나. 

편집자 오경철씨의 책 <편집 후기> 서평 제목을 뽑을 때였다. 이곳저곳에서 읽힐 만한 문장을 찾아보는데 참, 제목이 안 나온다 싶었다. 그때 원고를 쓱 위아래로 훑어봤다. 편집자로 사는 일도 쉽지 않구나,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일의 고단함이 원고에서 전해지는 것 같았다(물론 보람도 있겠지만).

그러다 떠오른 말이 '(편집자들이) 이러고 사는구나' 였다. 편집자를 일컬어 저자의 첫 번째 독자라고 하는 말은 왕왕 들어왔으니, 저자의 첫 번째 독자는 이러고 삽니다(https://omn.kr/25bd8)라고 하면, 독자는 이러고 산다는 내용이 뭔지 궁금할 것 같았다. '이지경입니다, 이 꼴 좀 보세요, 이렇게 삽니다' 등의 문장도 글을 읽은 후의 느낌을 생각하다가 떠올라서 쓰게 된 것들이다.

말과 문장이 만나면

이런 일도 있다. 올해 수능 하루 전날. 재택 근무가 일상인 나는 주로 오전에 클래식과 영화음악이 나오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놓고 근무를 하는데, 그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수능일은) 온 국민이 기도하는 날이죠."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고3과 전혀 상관없는 나조차 수험생들의 안녕을 빌었으니까. 재밌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날 오후 우연히 '수능 시험을 보지 않는 청소년들이 있고, 수능날 저녁 대학 비진학자들 모임이 열린다'는 내용의 글을 검토하게 되었다. 

16일, 수능 보는 청소년만 있는 건 아닙니다
대학 진학이 당연하지 않은 학교가 필요합니다


원래 글쓴이가 적어 보낸 제목은 이거였다. 부제에 나오듯 나도 처음에는 '학교에서 경쟁이 빠져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제목에서 살릴까 고민했다. 학교, 경쟁. 쓰다가 지웠다. 너무 많이 들었던 단어라 뻔한 내용으로 보일까 봐. 그렇다면... 대학 비진학자들이 파티를 연다는 소식에 초점을 맞춰 볼까?

수능날 저녁, 대학 비진학자들이 모입니다

'비진학자들'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수능 끝나고 수험권 지잠하면 각종 할인 혜택을 준다는데 수험권을 살려볼까. 

수능날 저녁 홍대, 수험권 없는 이들이 모이는 이유

도리도리 고개가 휙휙 저어졌다. 후배가 '대학 진학이 당연한가요? 그 생각에 반대합니다'를 제안했지만 어쩐지 작년 수능 때도 했던 말인 것 같았다. '했던 말 또 하기 싫은데...' 그때 '온 국민이 기도하는 날'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런 문장들을 써봤다.

온 국민이 수능을 말할 때, 저는 '학교'를 말하고 싶습니다
온 국민의 수능 응원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도 뭔가 딱 떨어지는 게 아니다 싶을 때 정확히 이 문단에서 내 눈이 멈췄다.

'매년 수능날이 있는 11월일수록 더 그렇다. 길가마다 걸려 있는 온갖 정당들의 수능 응원 메시지, 곳곳의 수능 응원 현수막은 마치 모든 청소년이 당연히 수능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라... 맞아, 그렇지. 수능을 안 보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부터도 그런 착각에 빠졌고. 이 문장을 살려서 쓰면 좋겠다. 그렇게 나온 게 '매년 수능날이면 온 국민이 빠지는 착각'이었다. 날이 수능날인지라 관심이 많아서도 그랬겠지만 조회수가 원만하게 상승 곡선을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내가 글의 핵심만 제목에 드러내려고 애썼다면 호기심과 재미, 읽고 싶게 만드는 문장을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과거에도 놓칠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놓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못한다. 다만 아는 것은 하나. 제목에 정답은 없다는 것. 내가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제목을 다듬는 이유다.

태그:#제목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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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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