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7 11:54최종 업데이트 23.09.2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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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남녀 동일 상금을 이끌어낸 전 미국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왼쪽)이 동일 상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 2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 챔피언십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테니스 팬으로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개최되는 US오픈 경기를 올해도 놓치지 않고 틈틈이 시청했다. 경기를 볼 때마다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코트 바닥에 새겨진 '동일임금 50주년(50 years of equal pay)'이라는 문구였다. 검색해보니 여성과 남성 선수에게 동일 액수의 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란다.

1972년 생애 9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거머쥐며 US오픈 여자 단식 우승의 주인공이 된 빌리 진 킹 선수는 자신이 받은 1만 달러의 상금이 남자 단식 우승자 상금 2만 5천 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현실이 "구리다(it stinks)"라고 말했다. 이어 이듬해부터 동료 여성 선수들과 집단 보이콧을 고려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저는 여성 선수들의 경기가 남성들의 경기에 버금가는 여흥의 가치(same entertainment value)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성 선수에게 동일 금액의 상금을 주지 않는다면 저를 비롯한 많은 여성 선수들이 내년에는 그 어디에서도 경기를 치르지 않을 겁니다."

1973년 US오픈 대회가 남녀 선수 모두에게 동일 상금 지급을 결정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여성 선수들의 조직적 항의가 배경이 됐다. 그해 7월 20일 자 <뉴욕타임스> 헤드라인은 이렇게 장식되었다. "테니스계는 모든 여성들도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Tennis Decides All Women Are Created Equal, Too)."

물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논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된 것은 아니다. 당시 프로테니스협회 회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랜드 슬램 경기에서 최대 5세트까지 뛰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최대 3세트까지만 뛴다는 점, 그리고 남성 선수들의 육체적 기량이 더욱 뛰어나다는 이유로 동일 상금의 논리를 조롱하고 반박했다. 그러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은 실현되었다.

미국에 이어 2001년부터는 호주오픈에서 성별 상금 격차가 완전히 사라졌고, 2006년 프랑스오픈과 2007년 윔블던에서도 남녀 선수에게 동일 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기계적 동등성 기준에 의한 차별 임금 대신 비교가능한 가치(comparable worth)의 등가성에 의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리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계까지 이어진 페이 미투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남녀 선수들 간 체력 차이가 테니스 기량 열등의 징표로 여겨질 수 없으며, 여성 선수들이 투여하는 노력과 에너지, 그들이 발휘하는 기량과 여흥의 가치는 남성 선수들의 것과 '같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다. 1951년에 체결된 국제노동기구(ILO)의 제100호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남녀 동일보수 협약'은 그렇게 여성들의 꾸준한 저항과 문제 제기를 통해 조금씩 현실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다. 그 긴 세월 동안 여성들은 계속 싸웠고 동료 시민들은 연대했다. 오랜 임금차별 관행에 맞서 페이 미투(pay me too) 운동이 확산되어 영화계까지 연대는 이어졌다. 남성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2018년 "여성 배우에게도 같은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나도 배역을 맡지 않겠다"고 발언해 주목을 받았다.

지구촌 곳곳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과 격차야말로 가장 오래되고도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정치가 앞장서서 불평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를 반영하여 여러 국가에서 '성평등 임금 공시제'가 시행되었다.

영국에서는 평등법에 따라 성별 임금격차 보고를 의무화하여 2017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근로자 25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는 매년 시급과 상여금의 평균값과 중앙값의 성별 격차, 상여금을 받은 노동자의 성별 비율, 임금 분포 4분위별 남성 및 여성 근로자 비중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독일도 2017년부터 '임금구조 투명성 강화를 위한 법'을 시행하여 20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동일 직급에서 동일 직무를 수행하는 동료의 임금을 열람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했다. 아이슬란드는 2018년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를 법제화했다. 노동자 25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주는 유사 가치 노동을 하는 동일 직급의 노동자들에게 동일임금을 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2020년부터는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1일 미화 5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프랑스는 2019년부터 성평등 지수 공시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50인 이상 사업장은 매년 남녀 노동자의 연령대별·동일 직급별 임금 및 승진 인원 비교, 가장 많은 임금을 받는 근로자 10명 중 여성 인원수 등의 성평등 지수를 매년 자사 홈페이지와 정부 웹사이트에 공개해야 한다. 2023년에는 호주 정부도 100명 이상의 직원을 보유한 기업에 성별 임금격차를 공개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임금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남성의 70% 수준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 셔터스톡

 
어떤 경우이든 임금정보 공개와 성평등 공시제의 목적은 성별 고용 및 임금 격차 해소에 있다. 임금격차는 성평등 수준을 파악하는 핵심 지표이므로 직급, 직무, 재직기간 등에 따른 성별 임금 정보를 공개하여 격차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단순히 격차를 확인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격차의 원인을 파악하여 개선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테레사 메이 영국 전 총리는 2016년 취임 당시 성별 임금격차를 영국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의 하나로 보고 "현 세대에서 성별 임금격차를 완전히 끝장내겠다"고 말했다. 케이티 갤러거 호주 여성부 장관은 지난 2월에 낸 성명을 통해 "현재 예상대로라면 성별 임금격차를 줄이는 데 26년이 더 걸릴 것"이라며 "여성들은 충분히 오래 기다렸다. 이 정부는 여성들이 26년을 더 기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별에 따른 임금 불평등의 완전한 해소를 위해 성별 임금 공시제도를 시급히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성별 임금 공시제 입법화 시기에 성별 임금격차는 영국의 경우 전일제 근로자 기준 8.6%, 전체 근로자 기준 17.9%이었다. 호주의 경우 당시 여성부 장관 성명에 의하면 전일제 근로자 기준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주당 14.1% 적게 받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이래 27년째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31.1%로 회원국 중 가장 컸다. OECD 평균 12%보다 20%p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국내 통계도 다르지 않다. 지난 9월 6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3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임금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남성의 70% 수준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ESG경영 시대, 비재무정보 공시는 의무

지난 5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취임 1년 기자간담회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를 위해서는 성별 임금격차 해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문제에 대한 진단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영국 총리나 호주 여성부 장관처럼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각오로 과단성과 추진력을 보여줘야 한다.

성별 임금 공시제를 도입하여 기업의 투명한 임금 공개를 의무화하는 것은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임금 정보에 기초하여 성별 격차의 실태를 파악하고, 격차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적극적 개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직급, 직종, 근속연수, 고용형태에 따른 성별 임금 정보의 공시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실효성 있는 성평등 임금 공시제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재계는 임금 정보가 영업 비밀이고 기업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임금 공시제에 반대한다. 그러나 ESG 경영의 시대 EU(유럽연합)와 주요국은 비재무정보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제도적 환경 변화 속에서 세계경제포럼, 세계거래소연맹, 나스닥 등은 비재무정보 공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직급별 남녀 비율과 성별 임금 격차 정보 등을 사회(S) 지표에 핵심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성별 임금 정보를 공시대상 정보에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 "성평등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통해서만 달성 가능하며, 성별 임금격차가 심한 기업조직은 평판 리스크와 법적 리스크가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ESG 경영의 시대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목표로 한 성별 임금 공시는 기업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라는 것이다.

다시 동일 임금 50주년을 기념하는 US오픈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미셸 오바마는 지난달 28일 빌리 진 킹 선수에게 경의를 표하고 획기적 사건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 모든 게 한낱 우승자에게 지급되는 수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훨씬 값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비추어지고 어떻게 가치평가되는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여성이 실현하는 동일노동의 가치와 그 가치에 대한 정당한 평가야말로 성평등의 초석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정부와 기업도 그 초석을 다지는 행보에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권혜원 /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권혜원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권혜원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 영역은 노동시장 이중화 해소, 노동권과 성평등의 의제를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산업노동학회 부회장,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성남시 생활임금위원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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