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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과 발사대 폐기를 약속하고 미국의 상응 조치가 있다면 영변 핵시설을 영구 폐기하겠다고 약속한 평양선언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허망함을 감출 수 없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과 코로나19 사태를 지나온 현재, 남북 간의 긴장은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뒤 남북 당국의 대화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고 있고, 신원식 국방부장관 후보자는 9.19 군사합의를 폐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평양선언이나 군사합의나 이제는 모두 소용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합의가 다 물거품이 돼버린 건 아니다. 단적인 예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남북의 군인들이 총 없이 근무하고 있는 현실이다. 지상·해상·공중 접경지역 일대에서 상호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는 것은 70년 전에 합의한 일인데, 이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합의한 게 평양선언의 부속서인 남북 군사합의서이다. 이행 완료된 조치 대부분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현재도 준수되고 있다.

"군사합의 파기는 제2의 개성공단이 될 수 있다"

당시 남북장성급군사회담 수석대표로 9.19 군사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도균 전 육군 수도방위사령관은 "국방부장관 후보자가 9.19 군사합의 폐기를 운운하는 경솔한 언행을 보면서 이게 정상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깝다"고 개탄했다.

19일 서울 여의동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 토론자로 나온 김 전 사령관은 "9.19 군사합의에는 정전협정의 취지와 기본 정신이 명확하게 포함돼 있기 때문에 (한미)연합사령관도 적극 지지 의사를 밝혔다"며 "합의 체결 이후 군사적 긴장 및 무력 충돌을 유발하는 위협적 행위가 적어도 군사분계선 일대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사였던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도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는 남북 군사합의 파기 주장에 대해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법을 어긴다고 해서 '그럼 법을 없애버리자'라는 주장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고 비유했다. 윤 의원은 "군사합의 파기는 제2의 개성공단이 될 수 있다"며 "개성공단을 폐쇄해 대한민국이 얻은 것과 북측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19일 서울 여의동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1부.
 19일 서울 여의동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1부.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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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건 "남북 대화는 박정희·노태우·김대중·노무현 이어달리기"

평양선언 당시 청와대 군비통제비서관으로 남북 합의를 주도한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모든 것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실패라고 주장하고,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정치 쇼'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한미 관계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했고 김정은에게 속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며 "이에 대한 제 반론은, 쇼라도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부터 북한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최대 압박 정책만 따라 했다면,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어찌 되었겠느냐. 남북 군사합의를 체결하지 않았다면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몇 번의 군사적 충돌이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해 몇 명의 국군 장병들이 사망했겠느냐"고 말했다.

최 교수는 "비록 북한의 위반이 있었고 우리 정부도 이에 대응하여 윤석열 정부 기간 동안 위반한 일이 있지만, 현재도 군사합의가 작동되고 있다. 평양 공동선언은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었지만, 남북 군사합의는 비교적 준수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이 박정희 정부의 7.4 공동성명,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의 정신과 내용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강조한 최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가 지금까지 이어달리기 정신으로 대북 협상과 대화를 추진하였듯이 현 정부도 그러한 이어달리기의 정신을 회복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임원혁 "기본 구도에 한계... 평화공존-위협감축 교환으로 다시 짜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해 다소 냉정한 시선을 제기한 이도 있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북미 대화 결렬은 "기본적인 교환 구도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교환 구도는 미국이 북한에 안전 보장을 제공하고,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보장하는 것이다. 임 교수는 "미국의 정책이 변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안전 보장을 제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며 "우크라이나나 이란의 경우를 보더라도, 핵 포기를 대가로 안전 보장을 제공하기로 한 주체가 마음을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 안전보장이 불가역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왜 핵을 개발하는 쪽이 이를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북한이 얘기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단순히 남북한의 핵무기 생산 배치가 아니라 (미국) 전략자산 전개와 같은 외부로부터의 핵 위협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며 "어떻게 김정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를 공약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이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북미 간에 단계적이고 상호적인 접근법을 통해 이행할 수 있느냐를 고민했는데, 이를 이행한다 하더라도 안전 보장과 한반도 비핵화에 도달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안전 보장과 비핵화를 교환하는 구도 대신 평화공존과 상호 위협 감축을 목표로 설정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기본 구도를 다시 짜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로 적정 수준의 억지력은 확보하면서 공동 안보 개념에 입각해 추가적인 위협은 차단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이 핵물질·핵무기 추가 생산 및 개발을 동결하고 수출을 못하도록 하는 게 달성 가능한 목표이고, 한국과 미국이 이를 위해 공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임 교수는 "만약 북미 간에 전략적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평화 공존뿐 아니라 관계 고도화를 추진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에 중·러 관계 없어... 친일 반민족 사관, 좀 특이한 정부"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임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노태우 정부가 북방 정책을 쓴 이후에는 한미 동맹도 굳건하게 유지하지만 주변국과의 협조도 강화하는 이런 구조를 보였는데 지금 윤석열 정부는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심지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때도 '글로벌 코리아'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내세우면서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가져가고 동시에 한미 동맹을 중시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진단했다.

임 교수는 이어 "흔히 뉴라이트 사관이라고 하는데 실체를 보면 친일 반민족 사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강제징용 건부터 시작해서 후쿠시마 오염수, 백선엽 장군, 홍범도 장군 건까지 진짜 좀 특이한 정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그럼에도 한반도 평화에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설득하려고 하는데, 윤석열 정부의 입장은 통일부를 축으로 하는 좌파 카르텔이 있다면서 이를 타도하는 것을 통일 외교 안보 정책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이동풍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면 이제 선거를 통해 정책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고 본다"면서도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주당 그리고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나 국민의힘 쪽에서 윤석열 검사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고 또 대선 후보로 영입한 데 대해서 본인들이 판단을 잘못했다든가 너무 순진했다든가 하는, 좀 자기 반성을 하고 사과가 있어야 한다"며 "'그런 게 없으니까 유권자 입장에선 '왜 우리가 다시 믿어줘야 하느냐'는 의구심이 있고 그래서 선거승리로 정책을 바꾸려고 해도 뭔가 불안감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19일 서울 여의동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1부.
 19일 서울 여의동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1부.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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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고민 없어 보이는 미국 편들기... 무조건 한 편 드는 나라 많지 않아"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장관을 지낸 강경화 전 장관은 한국의 외교정책이 미국을 맹종하고 있지 않느냐며 우려를 표했다. 강 전 장관은 "안보뿐 아니라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 한미 동맹을 지속적으로 다져나가야 하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미중 갈등 속에서 고민 없어 보이는 미국 편들기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강 전 장관은 "지금 동북아에서는 신냉전의 바람이 분명히 불고 있지만, 동북아를 넘어 세상 다른 곳에는 다른 흐름들도 감지되고 있다. 무조건 한 편을 드는 그런 나라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며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익을 철저히 따져서 실리를 취하는 실용외교를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스스로 전략적 사고를 하는 공간을 넓혀 나가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국력과 국제사회에서의 공신력이 있음을 4년 가까이 외교 장관을 하면서 실감했다"고 말했다.

강 전 장관은 "한국이 진정으로 중추적 국가의 역할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지역적·국제적 대결 구도 고착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에 힘을 보태는 것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그:#평양선언, #군사합의, #마이동풍, #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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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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