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2012년 고인이 된 이상길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2004년 여양리를 시작으로 2007년 경산 코발트, 2008년 산청 외공리, 원리, 2009년 진주 문산 진성고개 등을 발굴했다.

네 지역의 발굴지에 담긴 사연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 교수가 8년간 혼신을 바쳐 발굴했던 장소들이기에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여양리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관련 기사: 유해 안치된 컨테이너의 등장, 그 중심엔 한 남자가 있었다 https://omn.kr/25n0o)

여양리 발굴장을 찾아서

필자는 마산 여양리 발굴 10년 후인 2014년 유해 발굴 봉사를 시작했다.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여양리 발굴지를 답사하고 싶었는데, 2021년 9월 12일 진화위 조사관 2명, 진주 유족 3명과 함께 답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여양리 발굴지로 출발했다. 국도 2번 도로를 타고 45km 정도를 가다가 1029번 도로로 들어섰다. 도로는 아주 좁고 골짜기 폭은 200m 남짓이었다. 차장 밖은 초가을 벼들이 고개를 숙일 듯 말 듯 한 들녘과 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은 드문드문 보였고 8km 정도를 더 달려 여양리(산태골)에 도착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으로 느껴졌다. 발굴장 입구에는 여양 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이 펼쳐졌다.

이 교수가 깊은 관심을 가졌던 곳이라는 생각에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발굴지를 향했는데, 입구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무성한 풀밭이 뒤엉켜 우리를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유족분들이 낫을 가지고 앞장서 풀을 쳐준 덕분에 뒤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여양리 발굴장 숯막 입구 모습
 여양리 발굴장 숯막 입구 모습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산길은 아주 가파르고 험했다. 500m 이상 올라가니 너덜겅(돌무지무덤)들이 계곡을 끼고 널브러져 있었다. 너덜겅 바윗덩어리가 커서 발굴 작업의 난이도가 예상될 정도였다. 

그런데 폐광이 보이지 않았다. 유족들도 자주 오지 않으니 방향이 헷갈리는 듯 보였다. 발굴할 때 사흘이 멀다 하고 다녔지만, 발굴한 지 17년이 지난 곳이라 한참을 헤맸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유족회 회장님이 "여기 있다"고 외친다. 

우리 앞에 폐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으로 덮어져 숯가마 발굴지는 현장을 볼 수 없었지만, 너덜겅과 폐광 2개소의 발굴지를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발굴장이 살아 숨 쉬다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발굴 현장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아닌가. 대부분의 발굴 현장은 1~2년만 지나도 참혹한 그날의 흔적을 감추어 버린다. 초라한 표지판 하나로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숯가마(36구)는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다. 움푹 파인 숯가마의 위치만 남아 있었고, 유해는 토사와 함께 고추밭으로 휩쓸려 내려왔다.
 
너덜겅 무덤과 폐광 입구 모습
 너덜겅 무덤과 폐광 입구 모습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너덜겅 무덤과 폐광 입구 모습
 너덜겅 무덤과 폐광 입구 모습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반면 너덜겅(104구)과 폐광(23구)은 발굴한 흔적이 여기저기 조금씩 남아 있었다. 천막을 쳤던 흔적을 보니 발굴단이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발굴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상길 교수의 발자취도 느껴졌다.

큰 키에 깡마른 체격, 허스키한 목소리로 발굴단을 지시하고 다녔을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리움이 밀려왔다. 또 '2개월 동안 발굴하면서 고생이 많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을 살피고 간단히 촬영한 후 내려오면서 '가해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총부리를 겨눴는지', '피맺힌 절규를 뒤로한 채 산태골을 유골 밭으로 만들어 놓고 은폐하고자 했는지' 생각이 이어졌다. 이윽고 여양리 발굴지가 '역사와 진실이 밝혀진 교훈의 장'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18명의 여양리 발굴단 용사들
 
왼쪽에서 두 번째 이상길 교수 와 세 번째 김미영
 왼쪽에서 두 번째 이상길 교수 와 세 번째 김미영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2004년 5월 4일로 시계를 돌려 여양리 발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여양리 발굴단은 이상길 교수와 그의 제자들, 박물관 연구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필자가 발굴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먼저 발굴단을 수소문했다. 김미영 경남연구원 조사연구위원이 있는 경남 함안군을 방문했다. 따뜻한 음식을 대접 받으며 폐광 발굴 사연을 들었다.

여양리 3개소 발굴 중 발굴하기 가장 힘든 폐광 발굴은 경력이 많은 연구원 2명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인 김미영은 발굴 당시 폐광에는 회색빛 유기물과 시꺼먼 물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물에 잠긴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스펀지로 물을 짜냈으나 난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굴 안에는 유해가 꽉 차 있어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조사단은 폐광 내 양쪽 벽면에 철골을 세우고 그 위에 떡판처럼 판을 얹은 후 엎드리거나 낮은 자세로 앉아 떡판 사이로 손을 넣어 수습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몇 차례를 반복하면서 무사히 수습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필자는 순간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동안 발굴한답시고 돌아다녔지만 평평하고 언덕진 곳이 발굴 현장이었기에 이렇게 힘들 줄 감히 상상도 못 했다. 김미영 연구원은 이때 임신한 몸으로 발굴에 참여하였다. 저절로 고개 숙여 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험난했던 발굴
 
너덜겅 1호 유해 노출 상태
 너덜겅 1호 유해 노출 상태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너덜겅을 걷어내자 유해들이 드러났다. 물이 잘 빠지고 통풍이 잘되는 환경 탓에  너덜겅 속 유해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고 발굴하는 것은 고난도 작업이었다.

우선 가파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올라가는 내내 숨이 찼다. 또 포크레인으로 돌을 제거한 후 사람의 손으로 발굴이 시작되는 일반적인 발굴장과 달리, 포크레인도 올라갈 수 없는 험한 곳에 있어 사람이 일일이 바위를 옮긴 후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남대 사학과 남학생들이 총동원돼 바위를 걷어내었는데, 상상하기 힘든 작업임을 감히 짐작해본다.
 
폐광 속에서 걷어낸 유해
 폐광 속에서 걷어낸 유해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폐광 속 유해는 물속에 잠겨 공기가 들어가지 않은 덕분에 유해가 덜 부패해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상의와 함께 발견된 유해(고 정태인)는 우선 상의 속에서 뼈를 끄집어내었다. 머리카락이 머리에 붙은 채 발견되었고, 주변에 떨어진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수습 후 계곡물과 폐광 내 물로 유해를 세척하였다. 유해들의 옷은 무명옷, 삼베옷이라 삭아서 너덜너덜하고 실 가락처럼 뒤엉켜 흩어져 버렸다. 유해에 붙은 유기물과 진흙, 녹아 붙어있는 살점을 때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해 본다.

MG50 기관총과 쇠사슬
 
M1, 카빈탄피, 탄클립
 M1, 카빈탄피, 탄클립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유해 발굴장에서 유해와 함께 발굴되는 유품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피학살자들의 신분과 직업 판단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각종 군용품 중 MG50의 유품은 전국 어디에서도 발굴되지 않은 유일한 군용품이다.

2004년 경남대에서 작성한 '마산 여양리 유해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MG50은 사람에게 직접 쏘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맞추는 대공용(對空用)으로, 탱크나 차량에 부착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부피가 크고 무거워 이동이 불편하며, 2인 이상(사수와 조수)이 함께 사격해야 한다. 총으로서는 최대 크기이며, 이것보다 큰 것 포(砲)로 분류된다.
 
각종 군용품 MG50 설치 때 필요한 쇠사슬 흔적
 각종 군용품 MG50 설치 때 필요한 쇠사슬 흔적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상수리나무에 묶여 있는 이 쇠사슬은 MG50 기관총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기관총을 설치할 때 고정 보조기구로 이용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이곳은 낙동강 방어진 전투의 격전지였다. 그때 사용한 것일까? 무거운 기관총을 들고 500m 이상 가파른 골짜기를 올라갔을까? 만약 여양리 학살지에서 MG50 기관총을 사용했다면 총을 맞은 사람의 형체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양리에서 학살된 인원은 2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163구다. 나머지 유해는 이 총에 맞아서 산산조각이 났을까?

대부분 학살할 때 구덩이나 동굴 같은 장소에 데리고 가 총살한 후 묻어 확인 사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해 발굴장에서 발굴된 M1, 카빈 탄피는 16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살된 사람의 수에 비해서 탄피의 수가 적고, 매장지 내부에서 출토된 점도 의문을 품게 한다.

MG50 사용에 대해서는 의문투성이고 장기적인 연구 대상이다. 필자는 발굴한 이 교수가 그립다. 증언자인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막막하기만 하다.
 
너덜겅 1호에서 노출된 유품 반지
 너덜겅 1호에서 노출된 유품 반지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너덜겅에서 노출된 반지들
 너덜겅에서 노출된 반지들
ⓒ 김영희

관련사진보기


유해 발굴 시 반지도 여러 점 나왔다. 유품을 보면 하트모양, 은반지 무늬, 사각 무늬 등 고급스럽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낄 수 있는 반지의 유형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학살된 자들이 부유층으로 보이며, 지식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4회 여양리 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너덜겅, #여양리 발굴장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