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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해설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묻힌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와 사연을 소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해야 할 점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사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과 대한독립군 단독 작전은 아니었습니다. 대한독립군에 더해 안무가 이끌던 국민회군과 최진동이 이끌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 그리고 신민단이 함께한 독립군 부대 연합작전이었습니다.

1920년대 초 만주에는 무려 70여 개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들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국내에서 일제 군경대를 습격하기도 하는데요. 독립군 부대들끼리 힘을 합치면 더욱 효율적인 항전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연합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였습니다.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에 최진동, 부관에 안무, 연대장에 홍범도가 각각 역할을 맡았는데요. 일찌감치 봉오동에서 독립운동 터를 닦았던 이가 바로 군무도독부 최진동 장군입니다.

홍범도 장군과 독립운동 대소사 상의한 최진동 장군 
  
순국선열 최진동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호)
 순국선열 최진동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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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동 장군은 1883년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매우 어렵게 성장했는데요. 중국인 대지주의 머슴을 살다 양자가 된 사건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지주가 가진 큰 재산을 물려받고 이후 통역관으로 일하며 재산을 쌓았는데요. 봉오동 일대 황무지를 사들여 점차 대지주가 됩니다. 이후 동생인 최운산, 최치흥과 함께 독립운동의 후원자 겸 주역으로 나서게 되는데요.

봉오동에 학교를 세워 애국 사상을 널리 전파하는데 앞장서고 이상설 선생이 서전의숙을 개설할 때, 강우규 지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할 때도 최진동 장군이 후원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겨울 독립군인 군무도독부를 설립했습니다. 초기에 병력 200여 명을 4개 중대로 편성합니다. 또 1920년에는 북간도에 있는 여러 독립군과 단체를 통일하기 위해 대한신민단, 북로군정서, 광복단, 국민회, 의군부 등 대표와 만나 협의를 진행했습니다. 최진동 장군은 그 과정에 모든 일을 항상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홍범도 장군과 상호 협조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이후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규면의 대한신민회, 구춘선의 대한국민회 이범윤의 의군부 등 10여 개 부대 총 3500여 명 독립군이 하나의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재편했습니다. 그때 외교부장을 맡은 이가 최진동입니다.

하지만 곧 우리 독립운동사 최대 참변인 자유시 참변이 터졌습니다.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과 협력하는 노선을 따릅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참가해 레닌에게 권총을 선물받기도 합니다.

이후 최진동 장군은 러시아에서 북간도로 돌아와 독립운동 통합을 도모하고, 국내 진공을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최진동 장군이 이끄는 부대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도독부의 독립군의 수가 4119명이요, 장총 4059정, 기관총 27정, 대포가 4문등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940년 일본은 최진동 장군에게 비행장 확장을 위한 땅 기부를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했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최진동 장군은 1941년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독립운동 대소사를 상의했던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같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3묘역 251호는 홍범도 장군 묘역과 지근거리입니다. 대전현충원에서 재회한 두 분이 죽어서도 긴밀히 상의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독립군에 식량제공한 마하도, 무장시킨 박승길 
 
순국선열 마하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86호)
 순국선열 마하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86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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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86호에는 순국선열 마하도 선생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마하도 선생은 대한북로독군부가 설립될 때 서무부장에 선임되어 최진동 장군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1933년 7월 17일에는 반일동맹회에 가입해 활동하셨는데요. 항일 의식을 높이는 전단을 배포하고, 독립군에게 식량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피살되어 돌아가셨습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10호에는 봉오동 전투 서막을 연 삼둔자 전투의 주역 박승길 지사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개신교 감리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신민단이 조직되었습니다. 박승길 지사는 대한신민단 독립군 왕청현 지부 사령관 겸 참모장이었습니다. 병력 증강을 위해 군자금을 모아 소총과 탄약을 구입하고 500여 명 독립군을 무장시켰는데요.
  
애국지사 박승길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10호)
 애국지사 박승길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10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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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박승길 지사는 대한신민단 독립군 부대를 지휘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칩니다. 우선 5월 부하들을 데리고 함경북도 온성지역으로 진공합니다. 이때 일본군이 박승길 지사의 군대를 발견하고 추격에 나서는데요. 지사는 강을 건너는 일본군을 집중 사격으로 섬멸합니다.

곧이어 6월 4일 새벽 지사는 30명가량 부하만을 이끌고 더 과감한 작전에 나섭니다.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있는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데요. 이때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전공을 세웁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이들을 쫓기 위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쪽으로 침입하는데요. 박승길 지사는 삼둔자에서 이들을 기습해 추격군까지 몰살시킵니다. 이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 시작인 삼둔자 전투입니다.

중국 영토로 진입했던 일본군이 패배하자 일본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곧바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봉오동을 향해 진격하는데 이로서 봉오동 전투의 막이 오릅니다.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자 박승길 지사는 홍범도 장군과 전략을 협의하고, 봉오동 동쪽 고지에 매복했다가 일본군을 습격해 섬멸했습니다.
  
순국선열 김승민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256호)
 순국선열 김승민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256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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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256호에는 순국선열 김승민 선생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1872년 함경남도 함주군 연포면 신흥리에서 태어나셨는데요. 1909년에 헤이그 특사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옥살이를 한 후 북간도로 망명했습니다. 1920년 왕청현에서 광복단을 조직하는데요. 광복단은 유교 개혁과 대한제국 복벽을 주장하던 단체였습니다.

광복단 역시 항일 무장투쟁 노선을 지향했는데요. 1920년 5월에 4만여 원 군자금을 모았고, 1920년 8월에는 200여 명 병력과 소총 400정, 탄약 1만 1000발 등을 갖추며 무장을 완료했습니다.

이후 청산리 대첩 어랑촌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와 연합 작전으로 대승을 거둡니다. 김승민 선생은 광복단 고문으로 활동했고, 1925년 만주에서 대동회를 조직하다 일본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무장투쟁 나선 김창도
 
애국지사 김창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57호)
 애국지사 김창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57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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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독립유공자 1묘역 57호에는 태극단 소속으로 홍범도 장군 휘하에서 싸운 김창도 선생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1897년 5월 2일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대평외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고향을 떠나 평양 친척집에서 성장합니다.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하는데요. 3.1운동이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진압되는 실상을 보며 선생은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독립군에 가담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는데요. 선생이 찾아간 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으며 학교 운영과 지역 계몽에 힘썼는데요. 1920년부터 1924년까지는 태극단 소속으로 홍범도 장군 휘하에 들어가 각종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선생은 당시 상황을 자신의 일기 '자전록'에 고스란히 남겨놓았습니다.
 
"1920년 6월 7일. 나는 신흥무관학교 학생으로 봉오동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백두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태극단의 김오석 25군 부대와 연합해 정군중이었다. 왜군들이 우리 독립군 부대를 소탕한다고 두만강을 건너와 봉오동을 공격해 왔는데 놈들은 홍범도 장군의 연합부대에 전멸당하다시피 패하고 도주하였다."
 
"1920년 10월 봉오동 전투 후 우리 군은 안도현의 산악지대로 이동했다가 청산리 지역으로 갔다. 왜놈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중국정부와 교류하는 한국 독립군의 만주지역 활동을 문제 삼아 사단급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서 용정시를 중심으로 동만 일대를 공격했다. 왜군의 첨병 소대가 우리 앞을 지나고 이어서 전위소대가 도착. 우리 군이 먼저 적의 첨병 소대장을 사살하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청천 장군의 경호 장교로도 활동한 선생은 1927년에는 동명중학교에 부임해 민족교육에 전념했고 조국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습니다. 선생의 아들인 김원진 옹은 어릴 적 아버지의 심부름을 증언했습니다. 특정한 옷가게에서 옷과 신발을 사 입었는데, 그 옷과 신발 속에 독립군 비밀문서와 편지가 숨겨져 있던 이야기. 어떤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은 뒤, 그 집에서 보자기로 음식을 싸주었는데 그 보자기 안에 비밀문서가 숨어있던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김창도 선생은 생전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기 위해 서울에 찾아갔다가 화를 내며 그냥 돌아왔는데요. "친일했던 인사들이 지원받는 것을 보고 차라리 서훈을 안 받는다"고 신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창도 선생은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나서야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셨습니다.

대전현충원에는 홍범도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장을 누빈 동료가 많이 계십니다. 그들은 각자 정치 지향도 달랐고, 종교도 달랐으며, 사상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로지 조선을 독립시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하나만을 보고 뭉쳤습니다. 독립군은 때로 갈등하고 분열되어 있었지만, 연대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전현충원에 방문하신다면 홍범도 장군 묘소에 들러보시고, 장군과 함께한 전우의 묘소도 한 번씩 찾아뵈면 어떨까요? 머나먼 이국땅을 돌고 돌아 100여 년 만에 만난 홍범도 장군과 그의 동료들이 후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태그:#대전현충원, #홍범도,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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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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