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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하순 무렵 서울에 가서 한 출판인을 만났다. 그를 만난 이유는 솔직히 이런 저런 세상사 얘기 끝에 새로 쓸 작품에 대한 내 구상을 말한 뒤, 그가 그 가운데 한두 작품을 자기가 출판해 보겠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마포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애써 쓴 <전쟁과 사랑> 2쇄가 올 6월 5일 출간됐다. 그 작품 초판 2천부를 찍은 지 2년 만에 2쇄를 찍는지라, 게다가 그 작품은 나의 대표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기에 2쇄 출간에는 본문의 오타, 오류도 잡고 뭔가 새로운 각오로 최소한 1천부 이상을 찍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5백부만 찍었단다. 하기는 책만 잘 나가면 언제든 곧장 증쇄를 할 수 있기에 내 고집을 꺾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2쇄가 나온 뒤, 현재 내가 사는 원주시립도서관에서, 그리고 젊은 날 한창 시절 40여 년 살았던 서울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구미의 한 서점에서 북 콘서트를 가졌다. 그리고 기사로도, 또 한 매체를 통해 유튜브에도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을 펴낸 박도 작가'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새 두 달 남짓 지났다. 나는 곧 3쇄를 찍어야겠다는그의 말을 기대하면서 2쇄 판매량을 묻자 그는 그새 100부도 나가지 않은 상태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당분간 좀 쉬라'는 충고를 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띵' 한 충격을 받았다. 그날 열차를 타고 원주로 돌아오면서 그의 말을 곱씹어보면서 그의 조언대로 당분간 쉬기로 했다.
  
설악산 울산바위 장관
 설악산 울산바위 장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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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운의 연속

이튿날 예삿날과 달리 노트북도 켜지 않은 채 집안에서 맴돌자 몸부림이 났다. 세면도구와 수영복을 챙긴 뒤 지난날 몇 차례 가 본 강릉의 주문진 바다를 목표로 떠났다. 어릴 때 개발 헤엄으로 배운 수영 솜씨는 아직도 잊어 먹지 않아 동해 바다에서 잠시 즐긴 뒤 주문진의 한 밥집에서 회덮밥을 먹었다. 그런 뒤 그 옆집에서 가자미식혜를 한 통 사들고 역순으로 집에 돌아오자 밤 10시가 조금 지났다.

소지품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데 손전화가 보이지 않았다. 요즘은 손전화가 없으면그 순간부터 바깥 세상과는 차단이다. 거기에는 내 용돈뿐 아니라 거의 전 재산이 저장돼 있다. 경비실과 옆 집 전화를 빌려 통화를 시도해도 신호는 가는데 불통이다. 기억을 더듬자 전화기를 빠트렸을 듯한 세 곳이 떠올랐다. 첫 번은 가자미식혜 집이요, 그 두 번은 강릉-원주 시외버스요, 그 다음은 원주 시내 택시다.

다시 곰곰 되새겨 보니까 버스에 두고 내린 듯했다. 내가 강릉에서 타고 온 강원여객 버스는 그날 마지막 운행이었다. 만일 그 버스가 다음날 새벽 첫 차로 강릉이나 제3의 곳에 손님을 태우고 떠난다면 더 찾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정이 지났지만 콜택시를 불러 원주종합터미널로 가자 사무실도, 주차장도 불이 꺼진 상태였다.

게다가 요즘 원주종합터미널은 시외 ‧ 고속버스터미널이 한 곳으로 합쳐졌기에 대형버스회사는 시내 다른 곳에 주차한다는, 택시기사의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도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다. 그래저래 두루 돌아다니다가 새벽 2시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깼다. 다시 콜택시를 불러 원주종합터미널로 가자 내가 탔던 강원여객 버스 3대가 주차돼 있었다. 마침 그 가운데 한 버스에 기사가 타고 있기에 그에게 사정을 말하자 그 자리에서 숙소의 동료기사에게 전화로 연결 확인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사가 내 손전화를 주워서 자기 차 핸들 옆에 뒀는데 그날 오전 10시에 주차장으로 오면 돌려주겠단다. 그래서 그날 10시에야 그 손전화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8월 말, 처서가 지나자 더위도 한 풀 꺾였다. 1년에 네 차례씩 계절마다 만나는 친구들이 서로 연결돼 그제서야 정기모임을 갖기로 했다. 그 약속 날짜를 사흘 앞둔 날 하필이면 산책을 하던 가운데 발뒤꿈치가 쇠붙이에 긁혔다. 하필이면 그곳이 아킬레스 근이라 매우 불편하여 친구들에게 통보, 만남을 일단 늦췄다.

그 얼마 후 상처가 아물자 9월 둘째 주 화요일 날 양평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한 지 이틀 후 또 부주의로 무심결에 손가락 화상을 입었다. 그 화상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튿날 깨고 살펴보니 물집까지 생겼다. 병원에 가자 1주일 정도 통원 치료하라고 했다.

친구들과 약속 날, 왠지 가고 싶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고 싶었다. 다른 한편 생각해 보니 손가락 화상으로 내가 또 미루기에는 친구들에게 그 말이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약속대로 참석했다. 우리 셋은 양평 역에서 만나 그곳에 사는 친구의 안내로 용문산 기슭의 한 밥집으로 가서 점심을 나누면서 밀린 얘기들을 정답게 나눴다.

그런 가운데, 나는 화상을 그대로 이실직고한 뒤 병원에 가야한다는 핑계로 그날 오후 3시 차를 타고 원주의 한 외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접수대에서 치료비 계산하려는데 주머니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온 주머니와 휴대용 가방을 다 뒤져도 지갑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계산을 다음 날로 미루고 돌아오면서 양평에 사는 친구에게 아무래도 그 밥집에 지갑을 빠트린 것 같다고 말하자 잠시 후 그 밥집 주인이 잘 보관하고 있다는 반가운 답신이었다.

그 순간 나도 이제 별 수 없이 늙었다는, 어쩔 수 없이 노령기로 접어들었다는 절망감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눈앞이 컴컴했다. 이제는 모든 사회 활동도, 집필 생활도 멈춰야겠다고 작심을 한 다음, 맨 먼저 그 주말에 있을 다른 친구들에게 이번 모임에는 불참을 통보했다.
  
나의 고교(중동고) 시절, 그때부터 나는 명작을 남기는 꿈에 살았다.
 나의 고교(중동고) 시절, 그때부터 나는 명작을 남기는 꿈에 살았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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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있을 징조

그런 뒤 절망 속에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매주 한 번씩 내 집 청소를 도와주는 도우미 분이 어쩐지 내 표정이 우울해 보인다기에 그간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 얘기를 다 듣고나자 마자 나온 말이다.

"어머, 선생님! 곧 좋은 일이 있을 징조이에요."
"네엣?"
"궂은 일 뒤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온댔어요."


그 한 마디가 나에게 구원의 빛과 같은 음성으로 들렸다. 그래서 그동안 닫았던 내 노트북을 다시 열게 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 이대로 죽는 날을 기다릴 순 없어. 박도가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잖아.'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시도했다가 중단했던 쾌쾌 묵은 작품 자료들을 책장에서 꺼내 다시 챙겼다. 그런 뒤 장차 탈고될 이 이야기가 내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도록 하늘을 향해 깊이 기도 드렸다.

태그:#마지막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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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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